한국일보

월드컵 소확행

2018-06-06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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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축구팬들의 가슴을 뛰게 할 러시아 월드컵이 드디어 다음 주로 다가왔다. 32개국이 참가하는 이번 월드컵에서는 14일 주최국 러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의 개막전을 시작으로 오는 7월15일 결승전까지 총 64경기가 치러진다. 월드컵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한국과 미주 한인사회의 월드컵 분위기는 예전과 사뭇 다르다. 롤러코스터 곡예를 벌여온 북미정상회담과 한국 6.13 지방선거 등 워낙 굵직한 정치뉴스들이 잇달아 터져 나오다 보니 월드컵이 이에 묻혀버린 느낌이다.

월드컵 첫 경기의 휘슬이 울리는 14일은 북미정상회담과 지방선거가 끝난 바로 직후이다. 정상회담과 지방선거 결과 때문에 환호하거나 속 쓰려할 사람들에게 월드컵은 신바람을 더해주거나 혹은 힐링을 건네 줄 이벤트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만큼 월드컵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재미와 감동은 크다.

지구촌 최대 스포츠 이벤트는 올림픽이지만 지구촌 최고 인기 이벤트는 단연 월드컵이다. 축구의 인기는 다른 종목의 추종을 불허한다. 무엇보다 룰이 단순하다. 또 발과 머리로만 공을 다뤄야 하고 몸이 격렬하게 부딪힌다. 그만큼 원초적 성격이 강하다. 공을 ?으며 내달리는 선수들 모습에서 우리는 평원에서 동물들을 사냥했던 조상들을 떠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월드컵은 그야말로 ‘축구 뷔페’라 할 수 있다. 축구팬들로서는 하루도 거름 없이 풍성한 식단을 즐길 수 있는 축제이다. 여기에 애국심까지 더해지면서 참가국 국민들을 열광과 몰입으로 몰아넣는다. 2002년 월드컵 응원열기를 떠올려보라. 진정한 축구팬이라면 월드컵에 취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술의 신 이름을 따 월드컵을 ‘디오니소스 축제’라고 명명한 문화평론가도 있다.

월드컵은 치열한 대륙별 예선을 거친 나라들이 벌이는 최고수준의 국가 대항전이다. 여기에 국력은 발붙일 틈이 없다. 오로지 축구실력만이 문제될 뿐이다. G2니 G7이니 하는 구분은 무용지물이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과 중국은 이번 월드컵의 구경꾼 신세이다. 대신 작고 가난한 나라들 여럿이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러시아 월드컵의 관전 포인트는 차고 넘친다. 독일 브라질 아르헨티나 같은 축구강호들이 펼치는 경기는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다. 예선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벌이게 될 ‘이베리아 더비’ 등 라이벌 간의 맞대결도 흥미를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스포츠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약자의 반란에 있다. 언더독이 강팀을 무너뜨리는 걸 보면서 우리는 쾌감을 맛본다. 네모난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전복이 둥근 공이 굴러가는 그라운드에서는 종종 일어난다. 2106년 유로대회에서 고작 인구 30만인 북대서양의 작은 섬나라 아이슬란드가 촉구종주국 영국을 격침시켰을 때 느꼈던 짜릿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이슬란드는 이번 월드컵에서 또 한 번의 기적에 도전한다.

최근 ‘소확행’이라는, 소소하면서도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자는 트렌드가 확산되고 있다. 소확행 트렌드는 행복에 대한 인식이 미래에서 현재의 순간으로, 또 특별함에서 평범함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행복은 잔잔하게 자주 느끼는 게 중요하며, 그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게 소확행의 핵심이다.

그러니 축구팬들에게 월드컵은 소확행을 자주 경험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라 할 수 있다. 잠은 좀 설쳐야 하지만 매일 아침 뜨거운 커피 한 잔과 함께 맞는 월드컵 경기는 작은 행복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한인들은 내심 한국의 16강 진출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 스웨덴, 멕시코와 같은 조에 속한 한국의 16강 진출 가능성은 18.3%(ESPN 예상)에 불과하다. 이것이 객관적 현실이다.

운이 좋아서든 숨겨뒀던 실력 덕분이든 한국이 16강에 오르게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너무 실망하거나 분노하지는 말기 바란다. ‘국뽕’(과도한 애국심)에 너무 취하면 엔돌핀이 아니라 오히려 소확행을 해치는 코티솔 분비를 촉진시킬 수도 있으니 말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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