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달콤했던 과일 소주의 빈자리

2018-05-23 (수) 류정일 경제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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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긋한 과일 소주가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고 불만이 많았던 주당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2년여 전 마이애미의 한 주류 대리상이 마켓들의 횡포를 고발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이 대리상은 마켓에 뒷돈을 주지 않으면 가장 잘 팔리는 눈높이의 진열장을 뺏겼다. 제품을 판매할 냉장고를 사주고 전기료 명목으로 돈을 내야 했고 프로모션 비용도 모두 부담했다.

마켓의 요구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면 곧장 제품 주문량이 줄었고 경쟁사의 제품들이 잘 보이는 곳을 대신 차지했다. 한계에 몰린 대리상은 고민 끝에 시정부를 시작으로 고발에 돌입했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곳은 연방 재무부 산하의 주류담배세금무역국(TTB)이었다. 피해자 조사를 시작으로 업계의 대가성 돈거래인 ‘페이 투 플레이’의 발본색원에 나섰다. 2년의 준비기간을 거쳤고 연방의회를 설득해 별도로 500 만달러의 예산까지 받았다. 특별 조사팀이 전국 주요 도시에 파견됐고 지역 주류단속국과의 공조로 저인망식으로 훑었다.

LA도 비켜날 수 없었다. 올해 초부터 수사관들이 한인타운에도 잠입해 은밀하게 움직였다. 비단 불법관행 뿐 아니라 수입과 통관 절차의 적법성까지 하나하나 따졌다. 북가주 와인 산지에서는 포도밭까지 뒤졌다.

2년여 전 한인타운을 중심으로 타인종에게도 인기를 끌었던 다양한 과일 맛의 한국 소주가 한동안 자취를 감춘 것도 이번 단속의 여파였다. 주종에 따른 무역거래 품목분류 코드를 잘못 결정한 것이 이유로 알려졌다.

전국적으로 굵직한 조사만 50여건이 진행 중인 가운데 한인타운을 비롯한 관련 업계는 이번 단속을 투명 거래의 계기로 삼는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마켓이나 주점에 가면 즐길 수 있었던 달콤한 소주가 사라진 데는 이런 숨겨진 이유가 있었다. 익숙했던 병 모양이 바뀐 것이나, 진열대 위치가 달리진 것도 속사정은 따로 있었다.

흥미로운 부분은 100년 전 수정헌법 18조 비준으로 촉발된 금주령 시대도 아닌데 연방 요원들이 술 때문에 타운을 들쑤시고 다닌 점이다.

다만 이번 단속이 그저 불법 거래만을 막는 시늉에 그치지 말고 근본적인 갑을관계의 청산을 위한 신호탄이 돼주면 좋겠다.

어느 경제에서나 뒷돈 거래를 위한 재원 마련은 항상 소비자의 주머니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어느 소비자가 좋아하는 술을 마시면서 정해진 가격 외에 유통업자들 사이에 오가는 뒷돈까지 대신 대주고 싶겠는가 말이다.

<류정일 경제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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