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진실을 호도하는 ‘체리피킹’

2018-05-23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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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믿고 싶은 것만을 보려고 한다. 서로 상치되는 여러 증거들과 사례들이 앞에 놓여 있을 경우 기존의 내 생각과 관점을 강화시켜주는 것들만을 취사선택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애써 무시하려 든다. 그러면서 내 확신(편견)은 한층 더 강화된다.

이렇듯 나의 소신을 확인시켜주거나 나의 논지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사례나 자료만을 고르는 행위를, 체리나무에서 열매를 골라 따는 것에 빗대 ‘체리피킹’(cherry picking)이라 부른다. 체리피킹은 시대와 상관없는 아주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인간의 성향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성향이 20세기 말부터 사회의 근간을 위협할 정도로 공적 영역으로 급속히 확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적 이익의 보루가 돼야 할 정치와 언론의 체리피킹 행태는 사회의 갈등과 분노를 부추기고,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에 대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 한가운데는 정치적 양극화가 자리 잡고 있다. 정치권은 총체적 진실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부분적 사실만을 내세워 싸움을 벌이고, 이런 싸움은 또 다시 체리피킹을 부추기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트럼프 감세안을 둘러싼 양당의 주장을 상기해보라. 이런 풍경은 한국과 미국이 전혀 다르지 않다.

당파적 이익을 위해 편협한 주장과 궤변을 쏟아내는 정치판을 꾸짖고 유권자들이 진실에 다가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할 언론이 오히려 체리피킹에 앞장서고 있는 현실은 더욱 개탄스럽다. 언론 또한 양극화 되면서 보수언론 진보언론 할 것 없이 중심을 잃고 편향된 시각을 드러내는 게 일상화 된지 오래다. 이런 경향은 특히 북한관련 보도들에서 두드러진다.

미국의 북한전문 기관인 38노스는 지난해 북한과 미국이 연일 ‘말폭탄’을 주고받으며 일촉즉발 분위기를 조성한 데에는 사실을 정확히 전달하지 않은 언론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한바 있다. 당시 북한의 리용호 외무상은 아세안지역 안보포럼에서 “미국의 적대시 정책과 핵 위협이 근원적으로 청산되지 않은 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핵과 탄도로켓을 협상테이블에 올려놓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선택한 핵무력 강화의 길에서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많은 언론이 발언 앞부분은 생략한 채 뒷부분만 내보냈다. 38노스는 언론들이 자극적인 기사를 쓰기 위해 체리피킹을 했다고 꼬집었다. 맘에 들지 않는 부분은 잘라버리는 식으로 전체 뜻을 뒤트는 건 가장 전형적인 체리피킹 수법이다. ‘악마의 편집’이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사례는 남북 정상회담 후에도 여러 건 있었다. 한 언론은 미국 포춘지를 인용, ‘북핵 포기 비용 2,100조원…한국에 엄청난 타격’이란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그러나 포춘의 기사는 남북통일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사실은 감춘 채 2,100조원이라 액수만 부각시켜 당장 천문학적 돈이 들어갈 것처럼 독자들을 호도했다. 전체 맥락은 외면한 채 부분만 떼어내 비틀고 왜곡하는 못된 버릇이 재연된 것이다.

언론이 체리피킹의 유혹에 쉬 굴복하는 건 미디어 환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온라인과 SNS 시대에는 ‘장황한 진실’보다 ‘간결한 선동’이 훨씬 더 잘 먹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론이 대립하는 주장들 속에서 중립적이며 객관적인 시각을 가져야한다는 원칙은 달라질 수 없다. 그럼에도 어떤 언론은 자신들의 목적과 이익에 부합한다 싶으면 최소한의 검증조차 되지 않은 주장을 대서특필하는 극단적인 체리피킹까지 서슴지 않는다.

역사학자인 데이빗 그린버그는 이런 식의 정치권과 언론계 체리피킹이 ‘종말론적 사고’(apocalyptic thinking)를 닮아있다고 비판한다. 종말론적 사고에 빠지면 최소한의 규범이나 터부조차 사라진다. 정치는 갈수록 적대적이 되고, 팩트체크의 주체가 돼야 할 언론이 오히려 팩트체크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은 민주주의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언론의 책임 방기로 결국 진실에 대한 판단은 뉴스소비자들과 유권자들 몫으로 던져지고 있다. 그래서 사시사철 체리피킹이 지속되는 이 시대에 현명한 국민, 깨어있는 시민이 된다는 것은 여간 피곤하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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