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병’

2018-05-22 (화) 박준(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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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

한석란, ‘Inner Flares 8’

당신의 눈빛은
나를 잘 헐게 만든다

아무것에도
익숙해지지 않아야
울지 않을 수 있다

해서 수면(水面)은
새의 발자국을
기억하지 않는다


오래된 물길들이
산허리를 베는 저녁

강 건너 마을에
불빛이 마른 몸을 기댄다

미열을 앓는
당신의 머리맡에는
금방 앉았다 간다 하던 사람이
사나흘씩 머물다 가기도 했다

시인은 버려진 것에 영혼을 드리우는 사람들이다. 버려진 기차, 버려진 성곽, 버려진 도시, 버려진 강, 그리고 사람들. 버려진 것이 없다면 시인은 시를 쓸 수 없을 것이고 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람이 더럽힌 아픈 강가에 와, 한 시인이 오래 머문다. 아픈 사람을 두고 떠날 수 없듯이 황폐한 강의 머리맡을 쉬이 떠나지 못하는 그. 오래된 물길에 산허리를 베이며 먼 불빛에 마른 몸을 부비는 강은 쓸쓸하다. 어찌 하여 강은 병을 끌어안은 채로도 저리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가. 문병하는 시인의 마음이 우리 모두의 마음이다. 임혜신<시인>

<박준(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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