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평등의 황금시대가 열리려 한다… 이 순간을 잡아야 한다”

2018-05-1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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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투’ 이후 칸영화제의 자기반성

“평등의 황금시대가 열리려 한다… 이 순간을 잡아야 한다”

지난 토요일 칸 영화제에서 영화계의 성차별을 항의하는 여성 영화인들이 팔짱을 끼고 레드카펫을 걷고 있다. 레드카펫 시위에는 82명이 참가했다. 70년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여성 감독의 숫자다. 같은 기간 초청된 남성 감독은 1,688명이었다. [뉴욕타임스-올리비아 모린]

여성 영화인들 레드카펫서‘성 평등’ 요구 시위
여성 심사위원장 임명·성폭력 핫라인 개설…
남성 위주의 칸에 변화 계기 될까 관심 쏠려


유명 여배우로부터 스타들을 만나러 운집한 열성 팬들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칸에서 열리고 있는 금년 칸 영화제에 참석한 사람들은 누구나 영화제 주최 측에서 새로 개설한 성추행 핫라인에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철할 수 있다. 3명의 여성들이 상담해주는 핫라인은 매일 새벽 2시까지 운영되고 있다.

참가자들에게 나눠주는 토트백에는 성추행자는 감옥에 가거나 엄청난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경고하는 전단도 들어 있다. “파티를 망치지 말자, 추행을 멈춰라!”라고 적힌 전단이다.


수상작을 결정하는 심사위원단에도 금년엔 남성보다 여성의 숫자가 많고 심사위원장도 호주 출신의 여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맡았다.

금년 칸 영화제 ‘미투’의 하이라이트는 지난 토요일의 레드카펫 시위. 82명의 여성 영화인들이 팔짱을 끼고 손을 맞잡고 레드카펫을 걸어 들어가며 침묵의 행진을 벌였다. 82명은 지난 70년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여성 감독의 숫자다. 같은 기간 초청된 남성 감독 1,688명의 5%에도 못 미친다.

“여성은 세계의 소수자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산업의 현재 상황은 다르다”라고 블란쳇 위원장은 여성 감독 아그네스 바르다가 불어로 낭독한 메시지를 통해 말했다. 사진기자와 카메라 스탭들이 늘어선 레드카펫이 깔린 계단에 서서 블란쳇은 외쳤다 : “숙녀 여러분, 올라갑시다!”

화려한 파티와 호화요트 등 휘황찬란한 분위기에 휩싸여 왔던 칸 영화제였지만 금년 영화제를 뒤흔든 것은 ‘미투’의 반향이었다. 세계 최고로 자부하는 영화 경연제도 영화산업의 어두운 과거를 외면할 수도, 그 책임의 일부를 피해갈 수도 없는 일이다. 금년 역시 ‘고귀한 황금종려상’ 부문 후보작에 오른 21개 중 여성 감독의 작품은 3개뿐이었다.

금년으로 제71회를 맞는 칸 영화제는 품격 높은 영화의 도약대일 뿐 아니라 영화거래의 자유경쟁 시장이며 파티의 장소였다. 그리고 오랫동안 할리웃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상업용이자 오락용 놀이터였다. 현재 와인스틴은 수십명 여성들의 성추행 고발 혐의와 투쟁 중인데 그 수많은 사례 중 최소한 2건은 이전 칸 영화제에서 일어났다. (와인스틴은 합의되지 않은 ‘일방적 섹스’에 대한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그는 금년 영화제에는 참석하지 않았으나 그의 호시절 성적 분위기는 여전히 남아있다. 해변에 위치한 영화제 본부 밖에선 핫팬츠의 젊은 여성들이 롤러스케이트를 다고 다니며 패션잡지들을 나눠주고 있었다. 시스루의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을 오르내리는 신인 여배우들의 모습도 눈에 뜨인다. 남성 제작자와 감독, 탤런트 스카우터와 포토그래퍼들의 시선을 잡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칸의 고급호텔 로비에서 에스코트 서비스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칸 참석자들에겐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한 남자기자가 고급 호텔에 들어선지 10분도 채 안되어 2명의 여성이 다가왔다. 그중 한 명이 600 유로(약 700달러)를 주면 아파트로 따라 갈 수 있다고 제안했다.

“영화는 욕망 위에 세워진 세계다 : 제작자와 감독이 이러저러한 여배우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며 그 영화를 보고 싶다는 관객의 욕망이다 - 그리고 그 욕망은 신체적인 매력에 근거한다”고 마들렌 시아파 프랑스 성평등 부장관은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러나 “권력과 외모, 악명과 돈”이 합쳐지면 그 결과는 극단적으로 치달을 수 있는 “요소들의 칵테일”이 된다고 그는 말했다.


칸 영화제에서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미국 텐트는 유명 제작자들과 신인 제작자들이 대거 모이는 곳인데 이곳 방문자들은 만약 추행을 할 경우 멤버십을 박탈당한다고 경고하는 전자서류에 서명을 해야 한다.

금년에 새롭게 선보인 핫라인에 얼마나 많은 신고가 들어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시아파 부장관에 의하면 벌써 지난주에 신고를 원하는 한 여성을 경찰서에 동행해 준 경우도 있었다.

금년 심사위원장에 임명된 블란쳇은 할리웃에서 성추행에 반대하는 단체 ‘타임스 업’의 설립을 도운 미투운동의 기수로 알려졌다.

금년 ‘고귀한 황금종려상’후보에 오른 3명 여성 감독 중 한명인 프랑스의 에바 후손 감독 및 제작자는 이번 후보작인 ‘태양의 소녀들(Girls of the Sun)’ 제작에 필요한 400만 유로를 마련하는데 너무 힘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영화는 이슬람공화국(IS)에 맞서 싸우는 이라크 크루드족 여성 전사들의 이야기다. 그는 전쟁영화를 만드는 남성 제작자였다면 그 두 배의 제작비를 투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칸의 여성 감독이 거의 없는 것은 여성 감독의 영화가 드물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프랑스에선 여성 감독들을 위한 정부차원의 지원이 촉구되고 있다. 인구의 52%가 여성이지만 여성 감독은 전체 감독의 23%에 불과하다. “인구비율에 평등하게 대변하지 못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라고 후손 감독은 말했다.

그러나 이번 칸에서 낙관을 갖게 되었다고 그녀는 강조한다. 82명의 레드카펫 시위가 있은 다음 날 칸 영화제에서, 프랑수아즈 니센 프랑스 문화장관은 성 평등과 동등 임금을 조건부로 한 영화제작 지원금 규정을 제안할 것이라고 밝혔다.

“너무 기쁘다”고 말한 후손 감독은 “이제 황금빛 시대가 시작될 수 있다, 우린 이 순간을 잡아야한다”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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