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꽃 비 내리는 이 봄 날에’

2018-05-15 (화) 이종형(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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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비 내리는 이 봄 날에’
세 살에 아비 잃은 소년은
아비보다 더 나이 든 사내가 되었습니다

유품이라고 남겨진
새끼손가락 같은 상아 도장 하나
그 세월 긴 인연을 벗겨내기에
한없이 가엾고 가벼우나
마침내 사내는
세월을 거슬러 돌아와
소년에게 미안하다 합니다

먼 길을 돌아 걸어온 순례의 끝
죽음의 그늘을 벗기는
꽃이 피고 봄이 오고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간절한 노래는 다시 시작되나
나는 아직도 당신과 작별하지 못했습니다


이종형(1954-) ‘ 꽃 비 내리는 이 봄 날에’

어떤 시는 역사적 배경이나 시인의 의도를 알 때 감동이 깊어진다. 이 시는 그런 시의 하나로 피비린내 나던 제주 4.3 항쟁을 그 안에 담고 있다. 비극이 꽃이 되기까지는 얼마만한 시간이 흘러야 하는 걸까. 한 세대를 지나 이제는 아비보다 더 나이가 든 아들이 분노의 역사, 슬픔의 개인사와 화해를 해내고 있다. 꽃비 내리는 봄이다. 죽음의 그늘을 벗기며 오는 화해의 봄. 설움과 원한을 껴안은 이들을 대부분 세상을 떠나갔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가는 비극의 시대. 그 한 모퉁이에서 작별하지 못한 억울함이 꽃비로 흐른다. 임혜신<시인>

<이종형(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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