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홍트럼프’ 란 별명도 과분하다

2018-05-02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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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골자로 한 남북 정상 간의 ‘판문점 선언’이 나온 후 이의 실천을 위한 후속조치들이 빠르게 이어지고 있다. 이 성과에 힘입어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 또한 급물살을 타고 있다. 판문점 선언에 전 세계는 지지와 기대를 보내고 있으며 한국민 절대 다수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를 위시한 소수의 수구정치인들은 판문점 선언의 의미를 연신 깎아내리며 몽니와 어깃장 부리기에 여념이 없다. 홍 대표는 어김없이 주사파 타령을 반복하며 판문점 선언을 ‘위장 평화쇼’라고 부르는 등 거친 언사들을 마구 쏟아내고 있다. 판문점 선언에 대한 홍 대표의 처절한 부정은 보기에 딱할 정도다.

이런 반응을 보면서 생뚱맞게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최근 국제적 웃음거리가 된 한국프로농구연맹(KBL)의 외국인 선수 신장제한 규정이었다. KBL은 한국선수 보호와 흥행을 이유로 외국선수 신장을 장신 200cm 이하, 단신 186cm 이하로 제한한다고 발표했다. 알다시피 농구는 신장의 경기다. 그런데도 한국은 자국선수 보호를 이유로 키 큰 외국선수들을 쫓아냈다. 이런 폐쇄적 발상이 놀랍기만 하다. 아니나 다를까. 월스트릿저널 등 외국 언론들은 “이 규정이 세계적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데도 KBL만 그걸 모르고 있다”고 꼬집었다.

KBL식 농구로는 국제적 경쟁력을 아예 기대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는 국내흥행도 저해하게 된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돌아가든 상관없이 문을 걸어 잠그고 우리식대로 하겠다는 시대착오적 태도이다. 마치 구한말 쇄국주의를 보는 것 같다. 홍준표 대표의 지금 태도가 딱 그것을 닮아있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는데 여전히 냉전사고에 갇힌 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겉으로는 대의를 얘기하지만 그의 속내는 뻔하다. 사실은 판문점 선언으로 입게 될 자유한국당의 정치적 타격과 그럴 경우 위태롭게 될 자신의 입지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한 것이다. 한국의 수구정당은 적대적 북한을 기반으로 존립해 왔다.

그런 북한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존재를 뿌리 채 흔드는 중대한 상황변화이다. 수구의 주력 상품인 ‘안보장사’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판문점 선언으로 이들이 아노미적 혼란과 멘붕에 빠지고 있는 건 당연하다.

이런 때 보수층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이다. 홍 대표처럼 생떼에 가까운 무조건적 거부반응을 나타낼 것인가, 아니면 상황과 여론을 분석하면서 냉정하게 대응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일단 긍정적 평가를 하면서 실천과정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겠다는 일부 보수의 입장은 판문점 선언에 한 번은 기회를 주겠다는 합리적 대응이라 볼 수 있다.

극단적 이념에 사로잡힌 수구에 의해 합리적 보수는 지금 질식 상태에 놓여있다. 그리고 그런 수구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싸늘하다. “홍준표 대표는 현 집권세력을 가장 많이 도와주는 X맨”이라는 세간의 평가가 그걸 말해준다.

한반도의 봄이 보수에게는 잠시 동안의 추운 겨울이 될지 모르지만 동시에 합리적 보수가 제자리를 찾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정치세력은 판문점 선언에 재 뿌리는 일에만 골몰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밥상에 숟가락을 얹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게 더 현명하다.

공화당과의 채널을 풀가동해 자신들의 견해가 북미정상회담에 조금이나마 반영되도록 노력하고 그에 대한 크레딧을 주장하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이 될 수 있다. 당장의 위기감과 절망을 감정적으로 표출하기보다는 길게 보고 차분하게 국민들의 지지와 신뢰를 얻으려 힘쓰는 게 보수의 미래를 위한 길임을 깨달았으면 한다.

홍 대표의 별명 가운데 하나가 ‘홍트럼프’이다. 거침없는 트럼프의 캐릭터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인데, 트럼프와 달리 현실감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최근 그의 행보를 보면 이런 별명조차 과분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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