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제왕적 국회의원들’ 의 속셈

2018-04-18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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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발의한 개헌안을 둘러싼 정치권의 대립이 도무지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특히 개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권력구조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청와대와 여당은 현행 5년 대통령 단임제를 4년 연임으로 바꾸자고 하는 반면 제1 야당인 자유한국당은 국회가 국무총리를 뽑고 총리에게 실질적 국정운영을 맡기자는, 사실상의 의원내각제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다른 야당들은 절충 입장이다.

자유한국당과 일부 다른 야당이 4년 연임 대통령제를 반대하면서 드는 논거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이다. 이명박과 박근혜 시대를 거치면서 드러난 적폐 때문에 대통령제에 대한 우려와 피로감이 높아진 것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러니 ‘대통령들의 실패’가 곧바로 ‘대통령제의 실패’라는 인식으로 연결된다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지난 혼란과 퇴행을 과연 제도 탓으로만 돌릴 수 있는 것인지 냉정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특히 지금 의원내각제를 주장하고 있는 정치인들이야말로 대통령들이 제왕적으로 군림하는 데 일조해 온 바로 그 세력이 아닌가 묻고 싶다. 이들은 대통령들이 삼권분립의 원칙을 어겨가며 왕처럼 군림할 때 제동을 건 적이 거의 없다. 그저 묵묵히 순종하며 비굴하게 처신했을 뿐이다.


이들이 그토록 비판하는 제왕적 대통령이 되기를 거부했던 대통령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를 폄훼하고 조롱하며 탄핵까지 했다. 그랬던 세력이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 운운하며 국회 권력을 주장하니 위선적이고 뻔뻔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방관자 혹은 부역자였던 정치인들이 주장하는 의원내각제는 그래서 정당성과 신뢰를 얻기 힘들다.

이제부터라도 잘 하면 되지 않느냐고 우길 수도 있다. 국회가 혹여 환골탈태 한다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이든 조직이든 근본적인 형질은 잘 바뀌지 않을 뿐 아니라 바꾸기도 어렵다.

대한민국 국회가 갖고 있는 근본적 문제점은 다수의 특권의식에 찌든 제왕적 국회의원들로 구성돼 있다는 점이다. 연일 제왕적 대통령제를 비난하면서 정작 자기들은 상습적으로 신분증도 없이 비행기를 타는 등의 제왕적 행태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니 신뢰도 조사에서 국회는 어김없이 최하위 점수를 받는 것이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국민을 말하지만 그들의 정치에 국민은 없고 당파적 이익 추구와 지역정서 선동만이 있을 뿐이다. 지역주의 깃발만 꽂으면 당선되는 정치인들에게는 상식과 이성에 바탕을 둔 처신과 판단이 별로 필요치 않다.

대통령제 아래서는 꿈 꿀 수 없는 권력을 개헌을 통해 누려보겠다는 계산이 야당이 주장하는 권력구조에서 읽혀진다. 여론조사에서 국민 대다수가 여전히 대통령제를 선호하는 건 대통령제가 꼭 마음에 들어서라기보다 국회가 미덥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의 수준과 정치권 풍경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제도가 아니라 사람과 정치문화이다. 현재의 한국 정치문화와 여건으로 볼 때 제대로 된 국회의원들을 많이 뽑아 국회를 채우는 것보다는 제대로 된 한사람의 지도자를 고르는 게 더 현실적이고 실패 확률이 낮다고 국민들은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

훗날 한국이 정치적으로 좀 더 성숙하고 지역정서를 볼모로 한 후진정치가 발붙이지 못하게 된다면 지금 야당이 주장하는 권력구조를 고려해 봄직하다. 그때까지는 삼권의 한 축으로서 견제역할을 하는 데만 충실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의 야당이 이것만 잘했어도 그동안 나라꼴이 그 모양은 안됐을 것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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