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개헌 혹은 개악

2018-03-20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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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이후 지난 70년간 한국 국민은 10개의 헌법을 가졌다. 그러나 이들 헌법 중 대부분은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쿠데타 개헌’ ‘대통령 3선 허용 개헌’ ‘유신 개헌’ ‘전두환 개헌’ 등등 국민의 뜻과는 관계없이 집권자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이뤄졌다.

이들 헌법 중 국민의 의사가 반영된 것은 1948년 첫 번째 헌법과 1960년 4.19로 탄생한 제2 공화국 헌법,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얻어진 현행 헌법 정도라 봐야 한다. 그 중 초대 헌법은 박정희의 쿠데타로 생을 마감했고 의원 내각제를 바탕으로 한 제2 공화국 헌법은 국회 안에서의 극심한 파쟁으로 장면 정부를 무력화시켜 쿠데타의 명분을 줬다. 그나마 30년째 장수를 누리며 작동하고 있는 것은 현행 헌법이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일하다.

그 헌법을 문재인 정부가 국민과의 약속이라며 고치려 하고 있다. 그것도 몇 백억의 예산을 아끼기 위해 6월 지방 선거에 맞춰 함께 하겠다며 26일까지 국회에 발의하겠다고 한다. 새 헌법의 골자는 현행 5년인 대통령의 임기를 4년으로 하고 중임을 허용하는 것이라 한다.


정부의 이번 개헌안은 개헌의 주체, 시기, 그리고 무엇보다 내용이 모두 잘못 돼 있다. 대한민국 역사상 권력을 쥔 정부 주도 개헌이 국민의 뜻을 반영한 경우는 거의 없다. 현행 헌법은 한국 역사상 드물게 여야 간의 합의로 만들어졌으며 국민 78%가 참여해 94.5%라는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킨 역사적 작품이다.

이런 헌법을 고치기 위해서는 그 내용과 관련해 여야 간 협의와 국민 의견 수렴, 찬반 토론 등이 광범위하게 이뤄져야 한다. 지금까지 이런 작업이 있지도 않았고 여야 간의 심한 의견 차를 고려할 때 타협안이 마련될 가능성도 낮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개헌을 일방적으로 밀어 붙이겠다는 것은 1987 정신에 역행하는 것이다.

또 작년 한국의 GDP는 1조4,000억 달러로 세계 11위다. 그런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헌법을 개정하데 몇 백 억 원의 예산을 아끼겠다고 개헌을 서두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현행 헌법이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현행 헌법 하에서 대통령을 지낸 사람들의 말로가 하나 같이 비참했다는 것을 우연이라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5년 단임제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을 견제할 수단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국세청장, 국정원장, 감사원장, 검찰, 경찰 등을 수족 같이 부리는 그의 막강한 권한을 바라보고 너도나도 그나 그 자식들에게 연줄을 대기 위해 뇌물을 갖다 바치고 그 주위에 간신과 모리배들이 들끓기 때문에 온갖 비리가 터지는 일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비극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지금 얼굴 마담 수준인 총리의 지위를 높이고 청와대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강화하며 주요 권력 기관의 정치적 독립성 보장 및 지방 정부의 권한을 확대하는 쪽으로 가는 것이 바른 길일 텐데 정부 안에 이런 얘기는 찾아 볼 수 없다.

지난 30년간 대통령의 비리가 드러난 것은 대부분 집권 4년 차가 지나서였다. 그의 힘이 빠지는 집권 말기가 돼야 제대로 된 수사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정부 안처럼 집권 3년 후반기에 선거를 해 재선될 경우 지금처럼 대통령 비리를 파헤칠 수 있을까. 청와대 주변 부패는 남은 4년 동안 더욱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포퓰리즘이 판치는 상황에서 중임을 허용하면 집권하자마자 재선을 위해 온갖 선심성 정책을 펼칠 것이며, 필요하지만 단기적으로 국민들에게 고통을 주는 개혁은 시도조차 못할 것이 뻔하다. 이런 개헌은 개헌이 아니라 개악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 연방 헌법은 만든 지 230년이 넘었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물건이니 고치자는 이야기는 찾아 볼 수 없다. 그 오랜 세월 기본적인 골격을 유지한 채 27개 조항만을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국가의 기본인 헌법을 툭 하면 뜯어고치는 것은 정치적 안정만을 해칠 뿐 나라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졸속 개헌 추진을 중단하고 현행 헌법의 문제점에 관한 진지한 논의부터 하기 바란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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