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80여년 굴곡 많았지만 복된 말년 감사” 1980년대 LA한인회장 지낸 김죽봉씨

2018-03-19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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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 인터뷰] 유학-성공-좌절 겪었던 남가주 떠나…14년전부터 앨라배마서 리사이클링업

“80여년 굴곡 많았지만 복된 말년 감사” 1980년대 LA한인회장 지낸 김죽봉씨

파란만장한 인생을 포기할 줄 모르는 집념으로 헤쳐나간 김죽봉 회장이 항상 견딜 수 있는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행복한 노년을 살게 한다고 밝히고 있다. <최수희 기자>

“돌아보면 지독한 궁핍함에도 살아보았고 세계를 누비고 다니던 부유함에도 살아보았죠. 그리고 지금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1960년대 미국에 거주하며 한국 산업화의 역군으로 명성을 날렸던 김죽봉 전 LA 한인회장이 최근 자서전 ‘나의 하나님, 고난의 바다 위에서 본 별빛’(클리어마인드)을 펴냈다. 서울대를 나와 1958년 유학차 도미한 뒤 미국 선박업계, 철강업계, 목재업계에서 ‘J.B. Kim’으로 통하던 무역업체 대표로 1984년 LA 한인회장을 역임했고 10년을 끌었던 재판으로 개인 파산을 했던 그다. 모든 걸 가져보기도, 잃어보기도 한 인생을 살았다는 그는 84세인 현재 앨라배마의 한적한 도시 그린빌에서 아내 장영수씨와 할께 살면서 AIA 리사이클링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다음은 ‘복된 말년, 무한한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김죽봉 회장과의 일문일답.

-오랜만에 LA를 찾으셨다

▲지난해 12월 논픽션 ‘나의 하나님, 고난의 바다 위에서 본 별빛’을 펴냈다. 18일 내가 여기 LA 살 때 다니던 LA연합감리교회에서 출판기념회 겸 신앙 간증집회를 했다. 책을 쓰면서 꼭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다. 순간순간 내게 왔을지 모를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견딜 수 있는 고통을 주고 그 속에서 헤쳐 나올 지혜도 이미 주었음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앨라배마 생활은 어떠신지

▲앨라배마에 자리를 잡은 지 14년이 됐다. 앨라배마주 몽고메리는 현대자동차 등 한국 기업이 진출한 이래 한인 인구가 계속 늘고 있다. 코리아타운도 형성되고 있고 한인 교회 신도들의 평균 연령이 매우 젊다. 앨라배마로 오게 된 2004년은 내가 71세가 되던 해로 은퇴 결심을 한 무렵이었다.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예기치 못한 도움을 주었던 이 회장이 몽고메리에 새로운 사업을 하는데 고문을 맡아달라고 제의했다. 난생처음 미국 남부 앨라배마라는 땅을 밟았는데 LA와 정말 달랐다. 문명사회에서 한참 멀어진 느낌이었다. 새로운 사업도 생철을 번들로 찍는 사업이었는데 우여곡절을 겪으며 2007년 아내와 완전 이주를 했다.

-자서전에 사업 이야기는 극히 일부다.

▲내가 살아온 84년을 돌아보니 참으로 굴곡 많은 삶이었다고 생각되더라. 1934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나 학도병으로 전투에 참전하고 총상을 입고 부산으로 피난을 와 서울대에 진학하고… 그렇게 분단과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았고 50달러를 손에 쥐고 미국으로 이민 와 USC도 졸업했다. 또 고철 무역을 하면서 철강사업자로 성공도 했고 25년 만에 파산을 하며 빈손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들던 수많은 고비가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이 묵묵히 내가 감당하고 통과해야 할 시험이더라.

-전쟁에 대한 기억이 뚜렷하시다.

▲60여 년 전 나는 우리 민족에게 닥친 커다란 시련이었던 분단과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소중하고 놀라운 경험을 했다. 이 신비로운 경험은 그때 한 번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평생을 살면서 나약한 한 개인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에 처하거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마다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되었다. 장진호 전투가 벌어지기 전 나는 인근 함흥에 살았다. 그 살육의 현장이었던 반룡산에서 살아남았고 학도병으로 전투에 투입돼 수차례 포로로 잡히기도 하고 총상으로 다리를 절룩이는 상황에서도 결국 살아남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전쟁의 고통이 아니라 그 끝을 알 수 없는 암담함과 절망 끝에서 본 희망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그 와중에 유학을 감행했다.


▲ 어차피 태어났던 고향을 떠나 사는 곳이었기에 미국 유학 결심은 어렵지 않았다. 1958년 서울대 문리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북가주에 있는 프레즈노 스테이트 칼리지로 왔다. 한 학기 등록금 175달러를 내고 한달에 10달러하는 방값을 지불하고 나니 수중에 1달러75센트가 남더라. 복숭아 농장에서 복숭아를 따며 시급 1달러씩 받기도 하고 새크라멘토에서 피스워크도 하면서 돈을 벌어 공부를 했다. 1961년 USC로 옮겨와 경제학을 공부해 1967년에 학사학위를 받았다.

-복된 말년이라고 쓰셨는데.

▲성공가도를 달릴 때와 파산을 하고 난 후 극과 극의 차이를 겪었다. 현실은 엄혹해서 LA와 한국 그 어디에도 일거리를 의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좌절하거나 포기할 수 없어 ‘렉서스 코퍼레이션’이라는 새 회사를 차렸다. 동남아로 눈을 돌렸는데 필리핀 친구인 빙 디비에라의 연락이 왔다. 그렇게 예기치 않은 도움이 찾아오며 다시 고철 수출을 하게 됐고 앞서 말한 이회장을 만나 회사의 고문 역할을 하면서 오랜 세월 익힌 무역의 노하우를 젊은 직원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매우 보람찬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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