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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노림수

2018-02-13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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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가장 큰 이슈는 북한에 대한 태도다. 보수는 북한을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주적이며 수령 독재 체제를 유지하며 주민들의 인권을 짓밟는 집단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진보’는 북한도 같은 민족이며 도와주고 달래면 언젠가는 남한과도 평화 공존할 수 있는 존재로 본다.

한국의 ‘진보’가 진보가 아닌 것은 진보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과 평등의 잣대를 유독 북한에 대해서만은 들이대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 이런 가치보다 우선한다.

문재인 정부의 주요 지지 세력인 이들이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가장 비판한 부분도 남북 관계를 파탄시켰다는 것이다. 문재인도 대통령 후보 시절 집권하면 미국보다 북한에 먼저 가겠다고 말한 바 있다.

아니나 다를까 집권하자마자 작년 7월 베를린으로 달려가 한반도 평화 구상이란 것을 내놨다. 발표 이틀 전 북한이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을 발사했음에도 그는 이럴 때일수록 “대화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다”며 6.15와 10.4 선언 이행과 북한 체제 보장 비핵화 등 방안을 내놨다.

이에 대해 북한은 ‘노동신문’을 통해 문재인 구상에 “외세에 빌붙어 동족을 압살하려는 대결의 저의가 깔려 있으며 조선 반도의 평화와 북남 관계 개선에 도움은커녕 장애만을 덧쌓는 잠꼬대 같은 궤변들이 열거돼 있다”고 비난했다.

비슷한 시기 장웅 북한 IOC위원은 평창 동계 올림픽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자는 한국 제안과 관련 “좋게 말하면 천진난만하고 나쁘게 말하면 절망적“이라며 “단일팀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고 말했다.

그러던 북한이 느닷없이 태도를 돌변, 평창 동계 올림픽 남북 단일 아이스하키팀을 구성하고 선수단은 물론 대대적 응원단에 예술단, 김정은의 친동생인 김여정까지 파견했다.

이번 북한인들의 대거 방남은 김정은 신년사에 담긴 메시지의 실천이라 볼 수 있다. 김정은은 동계 올림픽과 관련 “대표단 파견을 포함하여 필요한 조치들을 취할 용의가 있으며 한 핏줄을 나눈 겨레로서 동족의 경사를 같이 기뻐하고 서로 도와주는 것은 응당한 일”이라고 말했다. 불과 몇 달 전 북한이 퍼붓던 비난과 욕설과는 많이 차이가 있어 보인다.

이러한 태도 변화는 유엔을 통한 대북 제재 압박 강화와 무관하지 않음은 물론이다. 중국의 석유 공급 감축과 해외 북한 노동자들 추방, 북한 기업 폐쇄 등 자금줄이 끊기자 돈이 필요해진 북한은 자연스레 지난 20년간 북한의 자금줄이던 남한 정부를 다시 쳐다보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은 지난 20년간 김대중 25억 달러, 노무현 44억 달러, 이명박 20억 달러, 박근혜 3억 달러 등 90억 달러가 넘는 돈과 현물을 북한에 보내줬다.

그 대가로 북한이 한 것은 제1, 제2 연평 해전을 일으키고 천안함을 격침했으며 연평도를 포격하고 금강산 관광객을 살해하고 목함 지뢰로 발목을 자르고 원자탄과 ICBM을 개발한 것이다.

북한은 김여정을 통해 문재인을 평양에 초청했지만 이번에는 쉽게 가기 어려워 보인다. 북한에 대한 국제 사회의 제재가 날로 거세져 가고 있는 지금 북한의 핵 포기를 전제로 한 회담이 아닌 한 퍼주기를 다시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냥 갔다 사진만 찍고 오는 일은 문재인 정부로서도 부담이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나 국경에는 최정예를 배치한다. 그러나 작년 11월 귀순한 탈북 병사 몸에서 기생충 수십 마리가 나오고 옥수수로 연명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 전투기 주력 기종 미그 19기는 만든지 40년 된 고철로 한국 전투기의 상대가 안 되는데다 그나마 기름 부족으로 훈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핵을 포기한다면 사실상 무장 해제를 하라는 것이나 다름없고 김정은이 그를 모를 리 없다.

지금 북한이 내놓을 수 있는 최대 카드는 핵과 미사일 실험 중단이다. 그 대가로 한미 군사 훈련 중단과 경제 협력을 요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북 제재에 관해 온도차를 보이고 있는 한미 간에 균열이 발생할 수 있고 궁지에 몰린 김정은으로서는 운신의 폭이 넓어질 수 있는 것이다. 초등학생 머리로도 뻔히 보이는 평양의 한 수에 문재인 정부가 어떻게 반응할 지 궁금하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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