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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중요하지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것들

2018-02-13 (화) 장부승 간사이 외국어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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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승 간사이 외국어대 교수·정치학

2차 대전 말기, 미군은 일본군 포로들을 심문하면서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한다. 포로들이 생각보다 쉽게 입을 연 것이다. 사실 일본군은 공포스런 존재였다. 항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군은 모든 투항을 금지했다. 군인에게 투항은 수치이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일본인들은 미군에 잡히면 잔인한 고문을 당한다고 세뇌되어 있었다. 그래서 일본 군인들은 가망 없는 전투에도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막상 포로가 되면 이들은 의외로 술술 입을 열었고, 군사기밀을 미군측에 넘겨주었다. 급격한 태도 변화는 자포자기와 교육 부족 때문이었다. 일본군 포로들은 자기들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다. 투항은 가족과 나라에 수치이니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욱이 투항 자체가 금지되었으니 포로로서의 대응 요령에 대해 아무런 사전 교육도 없었다. 일본군 포로들은 묵비권 등 제네바 협약 상 포로의 기본권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절대 항복해선 안 된다는 도덕적 규범만을 강조한 결과는 처참했다. 수많은 일본인이 항복하면 살 수 있었음에도 자살했다. 항복한 이들은 자포자기 상태에서 군사기밀을 미군측에 넘겼다. 일본군으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도덕만을 강조하고 실제적 대응 방침을 가르쳐 주지 않는 이 어리석은 정책이 과연 70년 전 일본군의 문제이기만 할까?

한국은 통계상 전 세계적으로 미혼모 발생률이 최저이다. 그러나 이 통계는 신빙성이 의심된다. 한국에서 2010년에만 약 17만건의 낙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생아 3명 대비 1명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또한 한국은 세계적인 입양 수출 대국이다. 2차 대전 후 전 세계 해외 입양아 50만명 중 20만명이 한국에서 왔다는 추계도 있다. 이 막대한 낙태와 입양은 대부분 미혼모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 통계에 따르면 미혼 임신자의 96%가 중절을 택하고, 태어난 아기의 70%는 입양된다. 한국 문화에서 미혼모는 도덕적 수치이다. 따라서 미혼모의 아이는 태어나선 안되며, 태어나면 입양되어야 한다. 더욱이 미혼 임신 자체가 윤리적 금기이므로 막상 미혼자가 임신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가르치지도 않는다.

노인 자살 문제는 어떤가? 한국은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자살 국가이다. 매일 약 40명이 자살하며, 지난 15년째 OECD 자살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자살률은 1998년 이후 급상승했다. 특히 남성과 노년층에서 상승률이 높았다. 현재 남성의 자살률은 여성의 2배가 넘는다. 65세 이상의 자살률도 평균의 2배가 넘고, 80대로 올라가면 평균의 4배가 넘는다. 즉 지난 20년간 한국이 자살대국이 된 것은 저소득층 고령 남성 집단에서 자살이 격증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갑자기 자살하는 것이 아니다. 대개 4,50대에 직장을 잃고 가족과 불화를 겪는다. 가부장으로서의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혼당하고 가족에게서 버림받으면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극심한 빈곤, 소외, 질병이다. 가족 부양과 교육에 소득을 소진한 이들은 자기 부양 여력도 없다. 그런데 이들 노인 빈곤층은 모든 것을 팔자소관으로 돌릴 뿐, 자기들이 가족에게서 버림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버림받은 가부장은 도덕적 수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도 가족에게서 버림받게 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

미혼모와 노인 빈곤뿐인가?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남성, 성폭력의 피해자가 된 동성애자, 더 나아가 이혼 가정은 또 어떤가? 이들은 윤리와 도덕의 보호 범위 밖에서 고립감과 소외를 경험하지만, 기존 제도권은 무엇이 바람직한지만 강조할 뿐 막상 이들이 직면한 현실적 문제는 외면한다.

한국은 이미 전통적 가족 개념이 급격히 붕괴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노인 빈곤, 자살, 낙태, 입양, 이혼, 게다가 세계 최저 출산율까지. 현실적으로 이미 발생하고 있는 이런 사회 문제들을 더 이상 윤리와 도덕의 이름으로 외면해선 안된다.

화재는 나쁜 것이라고 도덕적으로 강조만 한다고 눈앞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 이제는 타오르는 불길을 직시하고, 불길을 잡으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현실적인 대안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아기들이 죽어가고 노인들이 자살하고 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어디 호소할 곳도 찾지 못한 채 고립감 속에 숨죽여 몸을 떨고 있다. 70년 전 일본군의 과오를 오늘의 우리가 왜 반복해야 하나?

<장부승 간사이 외국어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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