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하이브리드 세상과 인격장애

2018-02-08 (목)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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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리드 세상과 인격장애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지난 연말 손녀들과 함께 만화영화 ‘코코’를 보고 연초에는 아내와 ‘신과 함께’를 관람했다. 두 영화 모두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이야기로 사후 세계의 모습과 가족 간의 사랑 그리고 정의로운 행위의 보상을 보여주었다. ‘코코’의 해골과 뼈대로만 된 죽은 자와 산 자, ‘신과 함께’의 죄와 벌, 삶과 죽음, 과거와 현재 등의 경계선이 점점 희미해지는 느낌이었다. 그것들은 서로 섞이고 어울려 샐러드드레싱이나 멜팅팟 등 하이브리드 형태로 변하고 있었다. 정신분석 용어로는 개체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형태이다.

그리스 신화에도 얼굴은 사람이고 몸통은 동물인 괴물들이 있으나 문명의 발전은 점점 하이브리드가 많은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다른 종류의 동식물의 유전자를 서로 교환하여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고, 개솔린과 배터리 모터가 합쳐져 움직이는 전동자동차, 사물과 사람이 연결되어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사물인터넷 기술의 등장이다.

정신의학에도 갈림길이 확실하지 않은 정신병이 있다. 경계성 인격장애다. 원래는 신경증(노이로제)과 정신증(미침 증세)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정신상태를 가진 사람을 뜻했는데 20세기에 들어와 인격장애라는 개념으로 진화되었다.


인격이란 타고난 성격을 바탕으로 주위 환경 속에 자라고, 배우고, 타인과 생활하면서 얻은 경험을 합쳐 ‘나’라는 특이한 개체, 즉 ‘나 됨’을 뜻한다. 지그문트 프로이드는 정신과 성의 발달과정, 에릭 에릭슨은 정신과 사회성의 발달과정에서 인격이 형성되어진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인격 형성과정이 잘 안 될 때 일어나는 정신적 문제가 인격장애라는 정신질환이다.

경계선 인격장애 증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호감이나 애정을 가진 사람과 떨어질 경우 불안정하고 부적응적인 감정, 사고, 행동, 인간관계 등에 심한 장애를 초래하는 애착능력의 결핍 그리고 분리불안을 잘 해결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그 결과 여러 다른 증세들이 따라 온다.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버림 받을까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며,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 좋을 때는 과잉칭찬, 나쁠 때는 과잉절하의 이분법 평가를 내린다. 내가 누구고 왜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 기분의 기복이 심해 감정조절이 안되어서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술 마약 과식, 문란한 섹스 자살위협 같은 충동적이고 자해적 행동을 보인다.

또한 화 내지 않아도 될 하찮은 일에도 분노가 폭발하고, 장시간의 공허함과 외로움에 우울을 호소한다. 드물게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현실세계를 떠난 것 같은 해리정신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증상들은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나타나며, 증상 때문에 심히 괴로워하고 학교, 직장, 가정생활을 원활히 할 수 없을 때 경계성 인격장애란 진단을 붙인다.

30대 초 미혼 여성이었다. 머리핀으로 자신의 팔뚝을 사정없이 긁은 뒤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켜 응급실로 끌려 왔다. 알고 보니 그녀를 치료 하던 심리상담사가 갑자기 휴가를 떠나자 외로움과 불안 그리고 심한 분노에 싸여 자살위협을 했던 것이다.

이런 일은 의존성, 강박성, 히스테리성 인격장애 환자들에게 주로 나타나나 드물게는 정상인의 삶 속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아직도 경계성 인격장애란 진단명을 인정하지 않는 정신과 의사들이 많아 진단논쟁은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여러 인격장애의 특징이 조금씩 섞인 하이브리드 형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실제로 교과서의 경계성 인격장애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아 임상에서 과다진단을 내리는 정신질환 중의 하나며 치료는 각 증상들을 완화시켜주는 약물복용과 현실적응 능력을 높여주는 인지행동요법을 사용하고 있다.

정보통신의 발달로 인한 4차 산업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두 눈이 팽팽 돌아가고 정신 줄이 나가기 쉬운 모습이다. 스마트 로봇, 사물인터넷, 불록체인 등 몇 달이 멀다하고 새로 나온 기술들이 우리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들고 있다. 알파고에서 보았듯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이제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신이 되기에 앞서 먼저 기계와 융합한 하이브리드 형태가 되어야겠다. 그래야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힘들게 쌓아 올렸던 바벨탑이 신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지는 꼴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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