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4페이지 메모와 트럼프

2018-02-07 (수) 남선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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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페이지 메모와 트럼프

남선우 변호사

내가 나이를 많이 먹어가면서 버지니아 법원 사건들을 기피하게 된 처지라서 몇 달 전 눈에 띈 해외첩보감시법원(FISC)의 변호사 모집 광고가 매력적이었다. 워싱턴DC에 위치한 그 비밀법원의 판사들을 보필하는 직업이라 한군데만 출근해도 될 뿐 아니라 연봉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원서조차 낼 수 없었던 것은 첫 요구조건이 국가기밀 취급증서의 소유자만 응모할 수 있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FISC법원은 1978년에 발효된 해외첩보감시법(FISA)에 입각한 비밀법원으로 연방대법원장이 7년 임기로 임명하는 11명 판사들조차 비공개되는 기관이다. FBI와 국가안전부(NSA) 같은 정보기관이 미국 내의 외국 정보기관들의 첩보원들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시 사찰을 하고자 할 때 FISC에 전화도청, 감시와 미행 등을 할 수 있도록 영장을 신청한다.

그런데 2016년에 FISA 법원이 승인한 영장들 가운데는 카터 페이지란 트럼프의 대선운동 조직의 전 외교전문가에 대한 것도 포함돼 있는 모양이다. 그가 러시아의 첩자로 의심 받은 모양으로 그의 전화 내용 등이 도청됐다는 것이 익명의 복수 소식통을 인용하는 신문들의 보도이다.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의 수사 종결 이후에나 확실해지겠지만 트럼프 자신이나 그의 측근이 선거기간 중 러시아와의 협조를 했었는지를 판가름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카터의 통화내용 가운데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일반 시민들은 물론 언론계마저 FISA 법원의 심리 내용은 낌새도 못 채고 있는 반면에 연방 상하양원의 정보위원회 소속 위원들만은 예외다. 그들은 절대 비밀유지를 전제로 한 비공개 회의에서 FISA 법원의 단골손님들인 법무부의 검사들이나 FBI등 첩보기관의 수장들이나 담당자들의 보고를 듣고 기밀서류를 볼 수 있다.

그런데 하원정보위원회의 위원장은 데빈 누네스(공화 가주)의원으로 작년에 트럼프 대통령에게 유리한 정보를 실제로는 백악관에서 얻어 와서는 자신의 보좌진에서 입수한 것으로 발표하여 주류 언론의 비웃음만 샀을 뿐 아니라 한동안은 위원장 직무도 다른 의원에게 맡기기까지 했던 사람이다. 바로 그 사람이 하원정보위원회의 공화당쪽 간사들이 마련한 4페이지짜리 메모를 공개하겠다면서 그것을 백악관에 보내 대통령의 재가를 요청해서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제임스 코미의 후임으로 트럼프 자신이 임명한 크리스토프 레이 FBI 국장과 로드 로젠스타인 법무부 부장관이 반대 입장을 강력하게 표명한데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공표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는 보도이다.

FBI와 법무부의 입장은 그 메모가 진실과는 거리가 멀 뿐 아니라 정보기관의 정보원과 활동방법에 대한 극비사항을 짐작케 하는 내용이라서 국가안보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정보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들도 한결같이 그 메모의 공개를 반대한다.

그 메모의 내용에는 카터 페이지를 빙자한 트럼프 타워의 도청이 사실은 영국 전 첩보원의 트럼프의 러시아에서의 부도덕/비행에 대한 비밀보고서 때문에 이뤄진 것이라서 FBI와 법무부의 반 트럼프 그리고 친 클린턴 세력의 음모라는 주장이 반영된 모양이다.

레이 FBI 국장이 누네스 하원정보위원장 측근들의 메모 발표를 공개적으로 반대한 이상 트럼프가 어떤 방식이던 메모의 공개를 허락하면 곧 사직할 것이라는 설마저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로젠스타인 차관이 뮬러를 해고시키라는 트럼프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으면 그마저 해임시키고 자기 말을 들을 사람을 후임으로 할 것이라는 추측도 난무한다.

데이빗 본 레흘이란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의 최근 글을 인용해보자. “정보위원회의 그의 아첨꾼인 데빈 누네스 의원과 같은 자들, 그리고 폭스 뉴스의 그의 대변인인 션 해니티 같은 부류의 도움을 받아 트럼프는 법무부으로부터 정의를 기대할 수 없으며, 미국 전체에 진실을 확립할 정도로 정직한 기관이 하나도 없다고 수백만의 미국인들을 설복시키고 있다.” 미국은 어디로 가고 있나?

<남선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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