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전한 MB의 ‘3치’

2018-01-24 (수) 조윤성 논설위원
작게 크게
배신은 인간 사이의 기본적인 신뢰가 깨지면서 일어난다. 이렇듯 상호관계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배신은 또 다른 배신을 부르는 경우가 많다. 지금 이명박(MB) 전 대통령이 처해있는 상황이 바로 그렇다.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는 각종 비리의 몸통으로 지목받는 MB를 더욱 옥죄는 것은 한때 그의 최측근이었던 인사들의 검찰진술과 폭로이다.

국회의원 시절부터 그를 그림자처럼 보좌했던 김희중 전 청와대 부속실장은 국정원 특활비를 달러로 바꿔 MB 부인 쪽에 전달했다고 검찰에서 밝혔으며, MB의 서울시장 재직시절 측근참모였던 정두언 전 의원은 방송에 출연해 MB 이너서클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열심히 털어놓고 있다. 이들이 MB에게서 등을 돌린 것은 충성을 다했음에도 정작 자신들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는 나 몰라라 한데 대한 서운함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MB의 지금 처지는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측근들에게 배신감을 안겨줬으며 허황된 경제공약으로 서민들을 기만하고 배신했다. 그러니 그가 여론의 지지는커녕, 수구정당의 막말 지원조차 받지 못한 채 고립무원의 상황에 빠져있는 것은 자업자득이다.


철학에서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의 조합을 ‘수행모순’(performative contradiction)이라고 부른다. 수행모순은 당사자의 평가와 신뢰감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상황에 따라서는 대단히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다. 부하들을 세워놓고 아주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는 권위적인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면 분위기가 어떻겠는가.

MB정권은 가장 두드러진 수행모순의 사례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는 2011년 청와대 비서관회의에서 “우리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므로 조그마한 허점도 남기면 안 된다”고 발언해 국민들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그가 이 말을 꺼낸 것은 수석보좌관이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고 문화관광부 차관이 부정혐의로 수사선상에 올라있던 시점이다.

MB 퇴임 후에도 속속 드러나고 있는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측근들의 독직과 부정부패, 국기문란 등 못된 행위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그리고 그 혐의의 질이 너무나 전근대적이고 반민주적이어서 서글플 정도다. 공과 사를 구분하는 초보적 의식조차 찾아볼 수 없다.

추악한 혐의들이 굴비처럼 엮여 나오는데도 그는 어떠한 반성의 표정도 없이 엉뚱한 궤변만 늘어놓고 있다. 며칠 전 읽은 입장문을 통해 자신에 대한 수사를 “역사뒤집기와 보복정치”로 규정했다. 혐의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해명도 없었다. 정말 떳떳하다면 당당하게 사실관계를 밝히면 될 일인데도 거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이 ‘보복 프레임’ 만들기에만 열중했다.

궁금한 것은 그의 정신세계이다.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있으면서도 현실적 필요 때문에 이런 전술적 스탠스를 취하는 것인지, 아니면 남들은 벌거벗은 것을 다 아는데 정말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혼자만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이 알고 싶다. 불교계에서 영향력 있는 한 스님은 ‘3치’로 요약되는 ‘몰염치’ ‘파렴치’ ‘후안무치’가 MB의 시대정신이라고 꼬집은 적이 있다. MB 정신세계의 실상이 무엇이든 ‘3치’ 진단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상습적인 수행모순이 일반인의 경우라면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인간’이란 평가로 끝나지만 그것이 권력자의 문제가 되면 그 여파와 후유증은 심각해진다. 자기파괴를 넘어 국가공동체에까지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 MB의 위선에 대해 뻔뻔하다는 지적을 넘어 사악하다는 질타까지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완벽히 부도덕했던 정권의 실체를 낱낱이 밝히고 지은 죄에 따라 처벌하는 것은 ‘적폐청산’도, ‘정치보복’도 아니다. ‘법치’의 당연한 실현일 뿐이다. 수구정권은 ‘법치’를 입에 올리길 누구보다도 좋아했다. 과도한 공권력을 동원할 때마다 그 근거로 이것을 들먹였다. 하지만 ‘법치’의 본질은 이게 아니다. 법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정신이 그 핵심이다. 물론 권력자도 예외는 아니다.

김희중 전 부속실장은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는 MB에 대해 23일 “탄핵정국을 경험하고도 저러고 있다. 그렇다고 진실이 가려지겠느냐”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MB는 이제라도 김희중씨의 개탄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3치’의 어리석은 미망을 깨뜨릴 수 있는 건 오로지 ‘법치’라는 죽비뿐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