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뉴잉글랜드의 가을

2017-10-17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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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잉글랜드는 미 동북부 지역에 있는 6개 주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매서추세츠, 로드 아일랜드, 코네티컷, 메인, 뉴햄프셔, 버몬트가 그들이다. 그 중에서 가장 작은 버몬트는 인구가 와이오밍을 제외하고는 미국 50개 주 가운데 가장 적지만 미합중국의 일원이 되기 전 독립 국가였던 4개주(하와이, 캘리포니아, 텍사스가 나머지다)의 하나고 부분적이긴 하지만 미국에서 가장 먼저 노예를 해방한 주다

이곳은 또 미국에서 메이플 시럽이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럽의 원료가 되는 단풍나무가 미국에서 단위 면적 당 가장 많기 때문이다.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10월 첫째와 둘째 주 이곳에 가면 단풍나무를 찾느라 애쓸 필요가 없다. 주 전체가 거대한 단풍나무 숲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매서추세츠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의 하나로 손꼽히는 보스턴에서 윌리엄스타운까지 모호크 트레일을 달린 후 그곳에서 북쪽으로 7번 도로를 타고 올라가면 끝없는 단풍 숲이 펼쳐진다. 그 중에서도 그린 마운틴 국유림을 관통하는 125번과 그 끝 행콕에서 스토우를 연결하는 100번, 스토우에서 제퍼슨빌을 잇는 108번 도로는 단풍 관광의 백미다. 가도 가도 끝나지 않는 황금과 빨강, 노랑과 초록의 향연이 여행자의 기를 질리게 만든다.


이 중 108번 도로 구간은 ‘밀수꾼의 골짜기’(Smuggler’s Notch)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미 독립 직후, 그리고 금주령이 내려졌던 20세기 초 캐나다와의 밀무역 통로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가파른 언덕과 기암괴석이 늘어서 있는 이곳은 밀수꾼들이 애용했을만 하다. 이곳과 모호크 트레일, 이웃 뉴햄프셔 주의 링컨과 콘웨이를 잇는 칸카마구스 트레일, 그리고 메인 주의 해변 도로를 뉴잉글랜드 4대 트레일이라 부른다.

버몬트의 스토우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인공으로 한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폰 트랍 일가가 정착한 곳으로 유명하다. 영화에서는 이들 가족이 나치의 압제를 피해 산을 넘어 스위스로 가는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에 간 후 미국으로 넘어왔다. 고향 오스트리아를 떠난 이유도 사실은 남작이 투자한 은행이 망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수녀 후보였다 남작 부인이 된 마리아는 전처 소생 7명과 자신이 남작과 낳은 아이 3명으로 가족 합창단을 만들어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돈을 벌었으며 그 돈으로 자신의 고향과 가장 닮은 스토우에 농장을 사 정착했다. 그것이 지금은 수십개의 방이 딸린 고급 호텔 트랍 패밀리 랏지의 모체다. 마을과 단풍 숲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이 호텔은 스키장과 타임셰어 콘도는 물론 독자 브랜드가 있는 양조장까지 운영하고 있다. 정통 오스트리아 맥주 제조법을 고수한다는데 깨끗한 맛이 일품이다.

트랍 일가는 미국에 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셈이지만 1987년 어머니 마리아가 사망하자 호텔 운영권을 놓고 10자녀 사이에 소송이 벌어져 주대법원까지 간 끝에 호텔 운영자가 보상금을 물어주고야 끝났다. 역시 영화와 현실은 다른 모양이다. 이 호텔은 아직 남작의 손자가 운영하고 있다.

버몬트와 쌍벽을 이루는 단풍 명소인 이웃 뉴햄프셔의 프랭코니아 골짜기는 내더니엘 호손의 ‘ 큰 바위 얼굴’의 소재가 된 큰 바위가 있던 곳이다. 언젠가 바위 형상을 닮은 위대한 인간이 출현할 것이란 전설을 듣고 자란 어니스트란 소년이 정치인과 부자, 장군 등 유명 인사들이 이 얼굴의 주인공이란 이야기를 듣고 만나보지만 다른 것을 알고 실망한다. 평범한 농부로 성실하게 살다 설교자가 된 그를 보고 한 시인이 “어니스트야 말로 큰 바위 얼굴이다”라고 소리친다는 이야기를 기억하는 한인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바위는 더 이상 볼 수 없다. 2003년 5월 3일 이 바위는 무너져 내려 한낱 돌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풍화작용으로 천혜의 예술품을 만든 자연은 역시 같은 방식으로 가져간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라도 하듯. 잠시 피었다 지는 단풍이야 말 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 한 달 뉴잉글랜드를 불태우는 단풍은 지나치도록 아름답다. 이곳 단풍 관광이 많은 미국인들의 버킷 리스트에 올라 있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버몬트와 뉴햄프셔의 단풍잎들은 아름다움과 짧음의 숙명적 관계를 조용히 떨어지며 속삭여준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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