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빛과 휴머니즘

2017-10-03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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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은 모든 한민족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삼국유사’ ‘기이’편에 실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에 천제 환인의 서자 환웅이 인간 세상에 마음을 두어 땅에 내려가 살기를 원하니 아버지가 3위 태백을 둘러보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홍익인간) 할만 한지라 천부인 3개를 주어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이에 환웅이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밑에 내려와 신시를 세우고 환웅 천왕이란 이름으로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과 생명, 병과 형벌 등 인간의 360가지 일을 주관하며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그 때 곰과 호랑이가 나타나 환웅에게 빌기를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니 환웅이 쑥 한타래와 마늘 20개를 주면서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아니하면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곰과 호랑이가 동굴에서 이를 먹으며 버텼는데 호랑이는 결국 참지 못해 굴에서 뛰쳐나왔고 곰은 삼칠일(21일)만에 웅녀란 여인으로 변신했다. 웅녀는 그와 혼인할 사람이 없었으므로 늘 신단수 아래서 아이 가지기를 빌자 환웅이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단군 왕검이라 하였다.

단군은 요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에 평양에 도읍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으며 나중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 여기서 1,500년을 다스리다 숨어 산신이 되었다는게 단군 신화의 줄거리다.

이 신화를 보면서 우선 느껴지는 것은 단군 신화를 만든 사람은 셋이라는 숫자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3위 태백’부터 ‘천부인 3개’, ‘무리 3천’ 3이 일곱번 되풀이 되는 ‘삼칠일’까지 3이라는 숫자가 거듭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근본적으로 세상은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세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다는 동양적 세계관을 엿볼수 있다.

하긴 셋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는 것은 단군 신화만은 아니다. 기독교에는 ‘삼위일체’가 있고 불교에는 ‘불법승’을 ‘삼보’라 부른다. 여간해서 쓰러지지 않는 솥발처럼 셋이라는 숫자는 인간에게 깊은 안정감을 주는가 보다.

이 신화의 또 하나 특징은 빛에 대한 동경이다. 천제 환인과 그 아들 환웅의 ‘환’은 우리말 ‘환하다‘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단군이 세운 나라의 이름이 ‘아름다운 아침’이라는 뜻의 ‘조선’이고 도읍의 이름이 ‘아침의 땅’이라는 뜻의 ‘아사달’이라는 사실은 한민족이 아침과 빛을 유난히 좋아하는 민족임을 말해준다. 해뜨는 곳을 찾아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해 동아시아 대륙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한반도에 자리잡은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신화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깊은 휴머니즘이다. 신인 천제의 아들도 인간 세상에서 살고 싶어 하늘에서 내려왔고 동물인 곰과 호랑이도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환웅이 지상에 온 목적 자체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곰이 어둠 속에서 삼칠일 동안 쑥과 마늘을 씹다 인간이 돼 밝은 빛속으로 나온다는 것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동물이며 고통을 견디며 동물적인 충동을 통제하지 못하면 인간이 될 수 없다는 통찰이 담겨 있다. 곰이었던 웅녀와 천신 환웅이 결합해 인간 단군을 낳았다는 것은 인간은 하늘과 땅, 신과 동물, 존재와 당위 사이에 놓인 중간자라는 인식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인간은 결국 하나님의 입김이 불어넣어진 흙이라는 기독교적 인간관과 다르지 않다.

환웅이 내려왔다는 신단수는 신화학적으로 ‘세계의 축’(axis mundi)이라 불리는 상징물로 세계 각국 수많은 신화에 등장한다. 땅에 뿌리를 박고 하늘을 향해 자라는 나무는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고리의 상징이며 땅에 발을 디디고 있지만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인간의 모습과 닮아 있다.

천제의 아들 환웅은 고통 없이 영원히 사는 하늘을 버리고 도대체 왜 백 하고도 여덟 가지 번뇌 속에 생노병사의 비극을 피할 수 없는 인간 세상에 내려온 것일까. 영원한 평화보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 지지고 볶아야 하는 인간의 삶이 더 값있다 본 것일까. 하긴 기독교의 하나님도 예수의 몸으로 인간 세상에 내려왔고 불교에서도 해탈을 할 수 있는 것은 동물도 신도 아닌 인간 뿐이라 본다. 4350번째 개천절을 맞아 단군 신화의 의미를 되새겨 본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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