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17 미주한국일보 문예공모전 시 부문] 입상작과 심사평

2017-08-1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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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석작 김예린, 가작 문숙희·김태수

▶ 장려상 손지아·김미영

▶ <당선작>

두부 (김예린)

따뜻한 목욕물에 고요히 잠기신 어머니


지난 봄날 새순을 적시던 이슬비 소리 들으시는가
콩대를 훑고 가던 여름날의 장대비
온몸을 후려치던 늦가을의 도리깨질
다 다 다아 다녀가는가
어머니 등을 덮고 있는 하얀 베수건이 젖어 들었다
세월에 물러진 어머니를 일으켜
조심스레 몸을 닦아 드렸다

맷돌에 부서지고
쓰디 쓴 간수를 마시며
가마솥 열기를 견뎌낸
뭉클뭉클한 어머니의 자리
일생을 짓누르던 돌덩이를 내려놓고
생의 마지막 부드럽고 순한 모습으로 가셨다

두툼하고 따뜻한 두부를
어머니 치마폭처럼 널다란 김치 잎에 감싸 먹는다
내가 만든 오랜 감옥으로부터 출소하는 날
어머니의 환한 미소가 입안에 퍼진다

당선소감

시를 짓는 일은 곧 나를 짓는 일이다. 시를 쓰는 순간만큼은 늘 평온하다. 그 어떤 분노나 불평, 불행이 끼어들 틈이 없다. 어줍잖고 못난 나이지만 그때만큼은 감히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시가 그렇게 나를 지었다. 세속에 찌든 나를 맑게 헹구어 순도 높은 둥근 삶을 지어나가게 했다. 이토록 시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순전히 남편 덕이다. 시와 먼저 바람난 남편은 밤새 시와 놀다 퀭한 눈으로 자신의 ‘애시’를 읽어주고 내 감상평을 기다리곤 했다. 그의 첫독자이자 아마추어 비평가이기도 했던 나는 그렇게 시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졸시 ‘시인의 아내’로 당선의 기쁨을 대신한다.

남편은 시 한 편 쓸 때마다/ 시가 어떠냐 물어본다/ 시하고 담 쌓고 사는 시시한 여편네/ 갓 퍼낸 밥 같은 첫 독자 평을 기다리는 것이다/ 시큼한 김치 찌개도 아니고/ 도통 맛을 모르겠으나 / 시인의 눈빛을 실망시킬 수 없어/ 제법 시 누이처럼 아는 척을 한다/ 오오 시상이 좋은데요 시심이 잘 드러났어요 시시콜콜 칭찬하다가/ 시 속에 시는 없고 시인만 들었네/ 시퉁하게 꼬집어도 보는데/ 그러면 가여운 시인은 시무룩해져/ 만신창이 제 시를 꼭 끌어안고 침실로 들어간다// 본처보다 시첩을 더 애끼는 남편/ 시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시들해질만하면 애시를 들이댄다/ 더러는 시샘이 솟구쳐서/ 에이 시~ 소리가 절로 나오지만/ 시나브로 어린애처럼 즐거워하는 / 그의 얼굴이 내게는 한 편의 시라서/ 짐짓 폼나는 시인의 아내로/ 시답잖은 그의 시 손을 들어준다// 언제가는 내가 지은 밥도 /시가 되는 꿈을 꾸며 -졸시, 시인의 아내

끝으로 미진한 시를 뽑아주신 나태주, 한혜영 선생님 그리고 미주한국일보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시다운 시를 지으라는 격려로 여기고 그에 앞서 부실한 삶부터 어여삐 짓겠다. 구순의 나이에도 시처럼 사시는 아버지, 깊은 애정으로 용기를 준 詩友 박인애님과도 기쁨을 나누고 싶다.


▶ <가작>

봄의 연서 -새로 돋는 잎 (문숙희)

그러니까 지난 가을이 끝나갈 무렵부터였나
자주 찬물 한 바가지 끼얹고 싶어졌던
그 여름의 폭염과 싸워 이겨낸
건장하고 의기양양했던 네가
가을의 끝에서 그만 맥을 놓아버렸던 게야
삼단 같던 머릿결도 윤기를 잃고
계절병을 앓고 있는 나처럼 너도
볕 지나가는 담벼락에라도 기대고 싶었던 듯
겨울 한파를 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찍소리도 안 했던 게 다 이유가 있었다고
겨울을 그렇게 견디어냈지

겨우내 썼다 지우며 키워온 연정
봄 물에 그만 터져 나오고야 말
그 마음 더는 숨길 수 없어
기여 이 잔인한 달에 네 생살을 찢는구나
육신의 실핏줄이 닿는 땅 속 어디쯤에서
물을 길어 올려 머리끝까지 퍼 나르더니
이제 막 자궁을 나온 어린것의 꼭 쥔 주먹
겹겹이 말아 감춘 은밀한 비밀 같은
그 연녹색 고백을 세상에 내어 놓았네
마침내 사월이다

수상 소감

내 문학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첫 단추는 잃어버린 문숙희를 되찾는 일이었다. 27년 나로 대변되었던 그 이름 안에 끝장내지 못한 ‘문청’의 미련을 가두고 정숙희가 되어 또 27년을 살았다. 이국의 삶은 고단했고 가느다란 실뿌리로 겨우 버텨내는 부유하는 수초 같았으며 모국어는 점차 내게서 멀어져 갔다. 긴 시간이 덧없이 흘렀으나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는 숨 가쁜 달음질 끝에 마침내 사유의 언어, 오래 품고 삭혀서 내어놓는 시의 언어를 내 안에서 다시 회복하게 됨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끓어 넘치는 뜨거운 열정은 세월 속에 묻혀 사그라들었지만 내게 주어진 남은 시간 동안 오래오래 비등점 아래서 시를 쓸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주신 나태주, 한혜영 두 분 심사위원님께 진심어린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 <시 부문 가작>

(김태수)

담금질 벼리고 나와
무서울 게 없어도
다칠까봐 모로 누워
각도 재며 기다린다
언제나
갈림길 앞에선
망설이며 살피고

무르고 무뎌서는
지난 길 묻힐까봐
퍼렇게 얻어맞아
날카롭게 일어서서
칼자루 목을 조이며
허공부터 가른다

멋지게 잘려나가
한 번에 끝내야 해
상처가 아물리게
온전히 다시 나게
단면을 들여다보는
날선 시선 품고 산다

수상 소감

입상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시조가 시 공모전에서 입상작으로 뽑힌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동안 낙방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시조는 시가 될 수 있어도 시는 시조가 될 수 없다’고 믿어, 시조를 좀 알아봐 달라고, 시 공모전에 ‘시조 포함’이라는 한 구절이라도 넣어 달라고, 공모전 때가 되면 시조 응모작을 보내곤 했습니다. 한국일보 문예공모전 입상은 이러한 저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시조 응모작이 자유시와 겨뤄 입상작으로 뽑혔다는 것이고, 좋은 시조 작품을 써서 미주 지역에 널리 알려야만 한다는 것을 다짐해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구한 역사를 같이해 온 우리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는 한국의 혼이요 맥박이라고 합니다. 미주 문단에도 시조의 바람이 일어 시조의 꽃이 활짝 피어 문향이 흩날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시 공모전’에서 입상이 안 된 것은 시조여서가 아니라 작품 수준이 함량 미달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유시와 견주어 손색없는 좋은 시조 작품을 써야만 한다고 다시한번 다짐해 봅니다. 나태주, 한혜영 심사위원님이 제 시조 작품을 시 공모전의 입상작으로 기꺼이 뽑아주신 것은 시 못지않은 좋은 시조 작품을 써 보라는 격려의 뜻이 담겨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신 미주문협 시조분과 안규복 위원장님과 늘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 조 옥동 미주시인협회 회장님께도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 <시부문 장려상>

숨은그림찾기 (손지아)

술 취한 회색 거위 뒤뚱거리며 지나가고
검은 나무 벼락 맞은 이름들 지나가고
숨은 그림 하나 찾지 못하고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나는
털모자를 벗어던지고 축축한 그의 등에다 침을 뱉었다

독사와 사슴 무리는 어디로 숨었나,
오리무중 소곤대는 도토리 알들
신록과 녹음 떨켜와 하얀 눈동자 처음부터 숨은 그림은 없었다
그것은 빠져나갈 수 없는 그의 등을 오랫동안 밟아준 나의 발걸음이었네

땅 위로 솟구쳐 사람이나 놀래 주지
가시동굴 속 산딸기는
나뭇잎 사이로 너울거리던 꿀밤은
뱀을 풀어 몸을 공중으로 날리던 지난여름은 무엇이었나

“관심 없는 짓거리 하지 마!”
숲이 와르르 몸을 털고 일어났다
얼어붙은 그의 등 위로 내리꽂히는 웃음
처음부터 숨은 그림은 없었네

수상 소감

문명에서 길을 잃고 야생으로 내몰린 고양이처럼 아프다고 울음 우는 여린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제 시를 뽑아주신 것은 건강한 은유로 세상과 제대로 소통해보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알고 시의 본성인 공적 차원의 ‘나’로 거듭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습작 기간 변함없는 위로와 힘을 주신 워싱턴 문인회 김행자 선생님, 권귀순 선생님, 박현숙 회장님을 비롯한 모든 문인회 회원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과 두 딸에게 이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부족한 시에 가능성을 열어주신 한혜영, 나태주 심사위원님, 미주 한국일보사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 <시 부문 장려상>

게임기 (김미영)

밖에 나가 뛰놀고 싶은
축구공

내 방 선반 위에서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는
배드민턴 채

나갈 준비 다 하고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는
자전거

꽁꽁 다
묶어 놓았다

수상 소감

“Mrs. Kim!”

매주 일요일 아침이면 교회 복도 건너편에서 마구 달려와 안기는 아이들이 있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Sunday School 초등학생들이다. 내 안에 끊임없이 동시가 꿈틀거리는 원천과 열정은 바로 그 작은 가슴들이 전해주는 온기이다.

미국 유학을 온 후, 나는 18년 동안이나 한국어를 까마득히 잊고 살아 내 안에 문학의 씨앗을 뿌릴 만한 한글의 밭은 몹시 황폐했었다. 모국어를 접하지 못하고 점점 한국인의 정체성마저 잃어가는 아이들. 문학이란 예술 장르를 통해 상상력을 확장해 나가야 할 나이에 전자 매체에 지나치게 노출되어 있는 아이들. 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결국, 동시의 씨앗을 틔우게 했고 푸릇푸릇 어느덧 잎이 자라고, 이렇게 꽃봉오리까지 맺게 된 것 같다.

이젠 그 작은 가슴들에게 내가 달려갈 차례다. 튼실한 동시의 열매를 영글게 해 주변의 교포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반나절을 맨발로 걸어 물 길어나르는 소말리아 어린이들에게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르카를 쓰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에게로...이젠 내 가슴이 달려갈 차례다.

한혜영(시인) 심사평

올해는 다른 때에 비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다소 부족해보였다.
그런 중에도 거론할 만한 작품은 여전히 있었고, 예심에서 걸러진 원고들을 대상으로
논의에 들어갔다.

그런 결과 당선작은 김 예린 님의 ‘두부’가 차지했다. 두부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어머니의 일생을 환기시키는 과정이 자연스러우면서 품위가 있다. “일생을 짓누르던 돌덩이를 내려놓고/생의 마지막 부드럽고 순한 모습으로 가셨다”를 읽다보면 숙연해지기까지 한다.
이밖에 함께 보낸 작품도 고른 수준을 보이고 있어 믿음이 갔다.

가작으로는 문 숙희 님의 ‘봄의 연서’와 김 태수 님의 ‘칼’을 뽑는다.
‘봄의 연서’는 모진 계절을 이겨내고 새잎이 돋는 나무를 통해서 인생을 말하고 있다.
착실하게 꾸려나간 점이 좋았으나, ‘새로 돋는 잎’이라는 부제는 필요가 없어 보인다.

김 태수 님의 ‘칼’은 오랜만에 대하는 시조여서 반가웠다. 정형시의 한계를 뛰어넘어 ‘칼’이 탄생하는 과정과 ‘칼’의 역할을 잘 아우른 점이 돋보였다.

장려상으로 손 지아 님의 ‘숨은그림찾기’와 김 미영 님의 ‘게임기’를 선정했다.

손지아 님의 ‘숨은그림찾기’는 시어를 다루는 솜씨는 좋으나 지나치게 관념적인 것이 흠이다. 주관적 감정의 객관화, 즉 시는 자기표현에 그치지 않고 독자와 더불어 나누는 정서임을 염두에 두면 좋겠다. 김 미영 님의 ‘게임기’는 제목을 충분히 활용하면서 주제를 잘 살리고 있다. 본문 어디에도 ‘게임’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하면서 ‘게임’으로 인한 폐해를 잘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장르가 동시여서 일반 시와의 경쟁력에서 다소 밀린 점이 아쉽다.

이상으로 수상자 전원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며 응모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다시 좋은 작품들을 만나 기쁩니다" 나태주(시인) 심사평

이번에도 태평양을 건어 온 미주한국일보의 신춘문예 시 응모작 원고를 읽었습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아름다운 선물이며 즐거운 작업입니다. 응모 편수가 예년에 비하여 조금 적었지만 그 질적인 수준만은 충분했습니다. 대번에 우열이 가려졌습니다.

역시 좋은 작품은 누구에게나 좋은 작품입니다.
후보작품을 고른 뒤 미국 플로리다에 계신 한혜영 시인과 전화 통화로 입장작품을 골랐습니다. 역시 합의가 빨랐고 상호 이견이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오래 함께 일을 한 이력이 나타나는 것이겠고 시를 보는 안목이 닮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이 사람에게 좋은 작품은 저 사람한테도 좋게 마련입니다.
이번에 뽑은 작품은 다섯 편. 순위는 있지만 그 순위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없이 그렇게 한 것임을 아시기 바라며 또 선에 들지 못한 작품도 선에 든 작품만큼 훨씬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뽑는 사람들의 안목에서 그럴 뿐이었다고 생각하시고 오래 마음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김예린씨의 작품 ‘두부’는 인생을 바라보는 눈길이 깊고 웅숭깊으며 시의 언어가 아름답고 적확합니다. 이런 점들이 남다름 감동으로 연결되는 요인이겠습니다. 다음으로 문숙희씨의 ‘봄의 연서’ 또한 톡톡 튀는 감성과 언어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으며, 김태수씨의 ‘칼’은 시조 작품인데 언어를 매만지는 솜씨가 그의 작품 제목인 ‘칼’만큼이나 매서웠고, 손지아씨의 ‘숨은그림찾기’는 시의 품격이 높았으나 시의 내용이나 구성에 있어 조금쯤 난해한 구석이 있지 않았나 하는 말이 심사위원들 사이에 오갔으며, 김미영씨의 ‘게임기’는 동시 작품인데 그 발상이나 표현이 매우 귀엽고 간결하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모두의 건필과 앞으로의 대성을 빕니다.

문제는 등단이나 출발이 아니고 끝까지 가는 마음이고 정진하는 순간순간의 빛나는 자기 노력입니다. 부디 모국어를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을 지금처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는 끝없는 자기 응시이며 자기 사랑이며 동시에 측은지심(부처님), 인(仁, 공자님), 긍휼히 여김(예수님)과도 가깝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마음, 봄비 같은 마음 없이는 인생의 거센 강물도 건너기 힘들며 시의 길에서도
환영 받기 어렵다는 것을 부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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