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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와 핸포드

2017-08-12 (토) 윤여춘 / 시애틀 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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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에겐 엊그제 8월9일이 악몽의 날이다. 72년 전(1945년) 그날 오전 미 공군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사흘 전 히로시마에 이어 두 번째다. 두 도시에서 20여만 명이 죽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불치병자가 됐다. 닷새 후 일본이 미국에 항복해 태평양 전쟁이 종식됐고, 한국은 다음날인 15일 36년의 일제통치에서 벗어나 ‘광복’을 이뤘다.

나가사키가 아비규환의 곡성에 잠겼지만 워싱턴주 중남부 시골마을 리치랜드에선 환호성이 터졌다. 그 원자폭탄의 플루토늄을 만든 핸포드 기지 종업원들이 사는 마을이다. 당시 지역신문 ‘빌리저’는 “평화! 우리 폭탄이 쟁취했다”고 썼다. 지금도 리치랜드 고교의 체육관 바닥엔 원폭 구름이 그려져 있다. 이 학교 농구팀의 마스코트는 ‘Bombers(폭격기)’이다.


연방정부는 1943년 콜럼비아 강변의 핸포드 일원 황무지 580평방마일을 매입하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당시 4만5,000여명이 투입돼 플루토늄을 만들어낸 핸포드는 핵폭탄 제조시설이 있었던 로스 알라모스(뉴멕시코) 및 오크 리지(테네시)와 함께 2014년 ‘맨해튼 프로젝트 국립역사공원’이 됐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대외비였던 원자폭탄 생산의 작전명이다.

그 후 핸포드는 다른 국립공원들처럼 일반 관광객들에 개방됐지만 전시물들이 당시 원자로 등 원자폭탄 제조의 긍정적인 면만 보여주고 있다. 공원국은 이곳에 원폭으로 잿더미가 된 히로시마-나가사키와 방사능 후유증에 시달리는 수많은 ‘히바쿠샤’ 등 원폭의 부정적인 면도 전시할 계획이지만 트럼프행정부의 예산삭감과 관심부족으로 지지부진한 상태다.

작년 8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하고 “1945년 8월6일 오전의 기억은 결코 퇴색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하자 트럼프는 당시 대선 캠페인 연설에서 오바마의 거동이 ‘신파 조’라며 “그나마 사과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비아냥했다. 트럼프행정부는 국립 공원국 직원을 1,200명 줄일 예정이어서 핸포드는 신규직원도 채용 못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미국이 핵공격 위협을 받고 있다. 일본이 아니라 북한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북한이 계속 위협하면 “이제껏 세상이 보지 못한 ‘불과 분노’(핵폭탄)를 맞게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그의 대선배인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세상이 보지 못한 ‘파멸의 비’가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라고 72년 전 일본에 경고했었다.

북한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에 이어 핵탄두 소형화도 성공해 워싱턴 DC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떠벌이자 트럼프는 자신의 행정명령으로 미국 핵무기가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다며 북한은 상대도 안 된다고 맞받아 쳤다(전문가들은 거짓말이라고 했다). 김정은도 기죽지 않았다. 북한을 겨냥한 미 공군의 첨단 폭격기 기지가 있는 괌부터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미시시피보다도 작은 나라 북한의 자기 아들또래 독재자 김정은을 상대로 티격태격 말싸움을 벌이는 트럼프가 채신머리없어 보인다. 세계 최강 미군의 통수권자다운 위엄이나 경륜이 없다. 워낙 말을 자제하지 못하고 나오는 대로 내뱉는 버릇이 있다. 팔짱을 끼고 앉아 두 번 되풀이 말한 ‘불과 분노’ 위협도 사전에 계산된 말이 아니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물론 트럼프의 열렬한 추종자들도 있다. 한 목사는 “하나님이 트럼프에게 김정은을 제거할 권한을 부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인용한 로마서 13장은 모든 권세가 하나님에게서 난다며 백성들이 그 권세에 굴복하라고만 가르친다. 김정은 권세도 하나님이 냈다는 의미다. 특히 12장 말미엔 “너희가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구절이 있다.

권좌가 불안한 김정은은 자신에게 쏠리는 국민의 적대감을 우회시킬 상징적 적국이 필요하다. 미국이다. 그가 섣불리 핵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하지만 트럼프도 ‘불과 분노’ 발언을 자제해야한다. 잔인한 성격의 김정은이 이판사판 상황에 빠져 핵버튼을 누르면 미국보다 먼저 서울 시민 수백만명이 희생된다. 72년 전의 나가사키 비극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윤여춘 / 시애틀 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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