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통령들은 독일에 가서 북한 이야기 하기를 좋아한다. 2000년 3월 김대중은 ‘베를린 선언’을, 2014년 3월에는 박근혜가 ‘드레스덴 선언’을 했고 지난 주에는 문재인이 다시 ‘베를린 2.0 선언’을 했다. 문재인은 북한을 흡수 통합할 의사가 없다며 북한 체제 안정을 보장하고 평화 협정 체결과 한반도 경제 공동체 건설을 추진하겠다며 이산 가족 상봉과 스포츠 교류 확대 등도 제안했다.
한국 지도자들이 독일에 가 대북 제안을 하는 것은 평화적으로 냉전을 끝내고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독일의 전례가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데 교훈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착각에 기초하고 있다.
동서독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룬 것은 두 나라가 한데 합쳐 큰 나라를 만들자고 의기투합해 성사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동독 주민들이 더 이상 못 살겠다고 서방 탈출을 감행했고 동독 지도자들이 이를 막기 위해 소련군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제 코가 석자’인 고르바초프가 이를 거부하자 주민 탄압을 포기하고 베를린 장벽 붕괴를 허용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동독 체제가 무너지자 당시 서독 총리이던 헬무트 콜은 잽싸게 이를 접수했고 막을 여력이 없던 소련이 마지못해 추인함으로써 독일 통일은 성사됐다. 그리고 불과 1년여 후 소련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한반도의 상황이 당시 독일과 판이함은 말할 것도 없다. 북한의 배후에는 든든한 후원자인 중국과 러시아가 버티고 있고 북한은 이들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자국 내 불만 세력을 진압할 수 있는 힘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 동독 주민들이 통일 전 서독인들과 교신과 여행의 자유를 누리고 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한 주민들은 스탈린 치하 주민들보다 더 심한 억압과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거기다 북한의 김정은은 핵과 미사일을 정권 연장의 생명선으로 여기고 있으며 불과 며칠 전 미 독립 기념일을 맞아 ICBM을 쏘아 올렸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과의 평화적 교류와 경제 지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독일인 사회자의 말처럼 좀 뜬금없이 들린다.
며칠 전 한국을 방문한 장웅 북한 IOC 위원은 문재인의 스포츠 교류 확대 제의를 예견이라도 한 듯 스포츠로 남북 교류의 물꼬를 틀 수 있다는 생각은 “좋게 말하면 천진난만이고 나쁘게 말하면 절망적”이라고 말했다. 김정은이 미국의 대북 적대 정책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핵과 미사일이 협상 테이블에 올라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 말한 점을 감안하면 북한이 문재인의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봐야 한다.
김정은이 미국의 거센 압박에도 불구하고 핵과 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것은 ICBM에 소형 핵탄두를 장착하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협상력이 커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공들여 완성된 핵무기를 김정은이 포기할 리도 없으려니와 그럴 것처럼 하면서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면 상상을 초월하는 거액을 요구할 것이 분명하다.
통일부가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때 한국은 43억 달러에 달하는 현금과 물자를 북한에 보냈다. 김대중 24억,이명박 19억, 김영삼 12억, 북한이 죽도록 미워하는 박근혜도 3억 달러를 보냈다.
북한은 이런 돈을 받고도 2002년 연평 해전을 일으켜 한국 해군 6명을 죽이고 19명을 부상시켰으며 2008년에는 금강산 관광을 하던 박왕자를 살해했으며 2010년에는 천안함을 침몰시켜 해군 장병 46명의 목숨을 빼앗았고 같은 해 연평도를 포격해 해병 2명과 민간인 2명을 죽이고 10여명에 중경상을 입혔다.
김대중 이후 10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과 물자가 어디에 쓰여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선군 정치와 핵과 미사일 개발이 북한 정권의 최우선 과제임을 감안할 때 이를 북한 주민들의 복지 후생에 대대적으로 쓰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북한 핵 문제가 불거진 1994년 이후 한미 양국과 국제사회는 북한 핵 개발을 막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북한은 사실상 핵과 미사일 보유국 목표에 거의 도달했다. ‘열 사람이 한 도둑 못 막는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 도둑의 의지가 집요하고 무자비할 때는 더욱 그렇다. 문재인은 퍼주기로 북한 핵과 미사일 개발을 막을 수 있다는 착각에서 하루 속히 깨어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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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