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쉼과 잊어버림의 축복

2017-05-31 (수) 12:00:00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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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만해도 아침에 자주 뛰곤 했다. 어느 날 재활의학 전문의인 동기생으로부터 “나이 좀 생각하라”는 핀잔을 들은 후 지금은 뛰는 대신 걷는다. 체중의 거의 2배 정도 무게가 한 발짝 뛸 때마다 무릎과 발목에 실린다는 사실 때문이다.

정신질환의 암이라 불리는 정신분열증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성장과정인 사춘기에 주로 발생한다. 원인은 아직도 확실히 모르지만 여러 추측 중 하나는 뇌신경 과학에 근거를 둔 ‘가지치기 이론’이다. 뇌신경 세포와 세포를 연결시켜주는 시냅시스는 사춘기에 이르러 빠르게 성장하고 이에 따라 신경망과 신경회로의 수도 갑자기 증가한다. 그 결과 뇌는 외부로부터 훨씬 많은 정보를 받아들여야 된다.

별 소용이 없는 정보들을 줄이기 위해 사춘기 뇌는 새로 생성된 신경망들을 가지치기하기 바쁘다. 이런 작업이 잘 안되어 정보의 홍수에 빠지게 되면 사춘기 아이는 정신분열 증세를 보인다는 주장이다.


창조주가 인간에게 베풀어준 축복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죽어야 하는 숙명이고, 다른 하나는 잊어버릴 수 있는 망각의 기술이다. 망각기술을 잊어버린 나는 나이에 맞지 않게 뛰었고, 사춘기 뇌는 신경망 가지 치는 일을 등한시하여 주인에게 정신분열증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뭔가 쓰려면 우선 나는 커튼을 닫고 옷을 벗는다. 그리고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아버린다. 자야지 하고 마음먹으면 5분 안에 코를 골 수 있다.”

몇년 전 작고한 최인호 작가가 한 말이다. 뇌도 다른 신체장기와 마찬가지로 휴식이 절대 필요하기에 그의 이야기는 생리학적으로도 이해가 간다.

100조가 넘는 신경세포로 구성된 인간의 뇌는 끊임없이 일을 하고 있다. 다른 신체장기들은 수면 중에 휴식을 취하지만 뇌는 먼저 일을 해야 휴식을 할 수 있다. 깨어 있을 때 받아들인 무수한 정보들을 시간, 필요성, 중요성에 따라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 부터 차곡차곡 집어넣는 작업이다. 기억의 저장 공간은 거의 무한대지만 깨끗이 튠업을 해주어야 앞으로 들어올 정보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들어오는 게 있으면 나가는 것도 있는 법. 뇌는 매일 받아들인 정보들을 걸러내고 정리해서 기억이란 형태로 저장한다. 그런데 주의력결핍증, 정신분열증, 치매의 경우에는 그 과정이 잘 안 된다. 계속 들어오는 정보들 때문에 나가려고 하는 정보들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정신분열증은 불필요한 신경망들을 가지 치지 못해 정보의 양이 넘쳐나고, ADHD는 정보를 제대로 분류하지 못해 둘 다 정보의 홍수에 빠져 버린다.

치매는 들어오고 나가는 정보 시스템이 다 망가진 경우다. 어떤 자극을 주어도 새로운 자극을 받아들이기 힘들고, 저장된 기억들을 내 보낼 수도 없다.

흥미로운 사실은 가끔 정신분열증이나 주의력결핍증 환자 중에 천재적 재능을 가진 예술가, 문학가, 과학자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아마 그들의 뇌도 쉬어야 할 때가 있고, 그 때 기다렸던 기억과 정보들이 봇물 터지 듯 나가는데 그 중에 기막힌 생각, 영감, 창조성이 섞여있기 때문이란 추측이다.

휴식과 게으름은 진화발생학적으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는 본능 중의 하나다. 어린애에서 성인, 부모 곁에 살다가 독립, 학교에서 직장, 직장에서 은퇴 등 여러 인생 고개를 넘어가려면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한다. 곰이 동면을 하듯, 인간도 틈틈이 쉬면서, 잠자면서 에너지를 저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불안전성 그로 인한 두려움의 늪에 빠져 살고 있다. 거기에 문명과 과학의 발달은 우리의 뇌를 쉬지 않게 만든다. 매일 매일 너무나 많은 정보에 허둥거린다. 그러니 가끔씩 쉬엄쉬엄 하며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좋지 않을까?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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