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익점 목화씨 안 들여왔다면 한반도서 털가죽 짐승 멸종
▶ ‘밀수=불법행위’고정관념 깨고 역사 바꾼 긍정행동으로 조명
한반도에서 털가죽 가진 짐승들은 씨가 말랐을지도 모르겠다. 고려 공민왕 시절,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몰래 들여와 이를 보급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한국에선 ‘나라를 빛낸 100명의 위인’이라며 노래로도 그의 업적을 기리지만, 당시 원나라 입장에서 문익점은 명백한 ‘불법 밀수꾼’이었으리라.
밀수이야기, 사이먼 하비 지음, 예문아카이브 펴냄
밀수(密輸)하면 누구나 부정적인 생각을 먼저 떠올린다. ‘몰래 물건을 사들여 오거나 내다 파는 불법적인 행동’이라는 의미와 함께 포획이 금지된 동물의 신체 일부, 불법 노동으로 거둬들인 광물, 인간을 좀 먹는 마약 같은 이미지가 함께 떠오르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역사·미술사학자인 사이먼 하비 노르웨이 트론헤임대 교수는 신간 ‘밀수 이야기’에서 이 같은 고정관념을 뿌리째 흔든다. “밀수가 없었다면 문명의 확산도 없고, 지금의 세계화도 불가능했다.” 책은 단순한 불법 행위를 넘어 문명을 전파하고 세계 패권 구도를 바꾼 밀수의 역사를 15~21세기에 걸쳐 펼쳐낸다.
저자는 밀수의 역사를 낭만·반역·권력이라는 세 가지 프리즘으로 풀어냈다. 코탄 왕국 국왕의 ‘기술 유출 작전’이 밀수를 바라보는 이들 세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코탄은 현재의 중국 신장성 위구르 자치구 타클라마칸 타림 분지에 있던 불교왕국이다. 코탄의 국왕은 중국 공주와 혼인하며 그녀의 머리 장식에 뽕나무 씨앗과 누에를 숨겨 들여왔다.
당시 중국 왕실 재정 수입의 상당 부분은 실크가 차지했는데, 이런 이유로 뽕나무 씨앗이나 누에의 수출은 법으로 금지되고, 생산기술 역시 국가 기밀이었다. 코탄 국왕은 이 과감한 밀수를 통해 나라 재정을 좀 먹던 부담스러운 수입품(실크)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하비 교수는 이 일화를 통해 ▲밀수 행위가 강력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와 맞물려 세계의 역사를 바꿀 수 있고 ▲밀수는 빈번히 반역과 연관돼 있으며(중국 공주는 엄밀한 의미에서 반역자였다) ▲밀수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낭만적인 일화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밀수의 배후에는 강력한 권력 기관이 있었다. 1568년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는 세계일주 항해를 시작하려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불러 은밀하게 명령한다. 당시 스페인이 독점하던 향신료 밀수에 꼭 성공해 함선을 가득 채워 돌아오라고. 심지어 이 임무를 완수하라며 발포와 약탈까지 허락했다. 나폴레옹은 1811년 프랑스 그라블린에 위치한 외국인 거주지에 밀수도시를 세웠다. 목적은 단 하나. 영국 밀수꾼들로 하여금 영국 금화 ‘기니’(Guinea)를 몰래 들여오게 하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영국과 스페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어 은화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반면 기니는 이보다 확보가 쉬웠고, 당시 전쟁으로 각국 통화가 평가절하된 가운데 금 함량이 높은 기니는 여전히 안정적인 통화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역사 속 밀수 강국은 하나같이 그 시대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15~16세기 대항해 시대의 포르투갈은 경제 패권을 쥐었고, 17세기 네덜란드는 향신료 독점을 통해 부국으로 우뚝 섰다. 영국은 밀수를 발판 삼아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을 완성했다. 지금의 수퍼 파워 미국에 이르기까지 밀수는 국제관계와 분쟁, 세계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세상 모든 곳을 비춰온 가장 어두운 거래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오늘날에도 연간 10조 달러 규모의 밀수가 이뤄지고 있다. 저자는 “밀수는 과거의 역사가 아닌 엄연한 현실”이라며 “밀수의 역사를 살피지 않고는 세상 흐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시대·나라별 은밀한 거래 이야기가 마치 한 편의 첩보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정리됐다. 가장 강력하면서도 위험한 밀수품, 문화와 사상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