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싯적 본 영화였던 것 같다. 아니면 소설이었나?
낙엽 구르는 추운 날 가난한 하숙생 남자가 양옥집(?) 이층 창가를 올려다보는 모습. 거기엔 따스해 보이는 노랑 불빛에 감싸인 여대생이 피아노를 치고 있다.
나의 대학 시절은 양옥 속의 여자를 먹먹한 심정으로 바라볼 처지보다는 여러모로 향상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마음은 늘 그처럼 가난했던 것 같다. 남들은 다 따스한 방, 음악 소리 속에 사는데 나만 창 너머로 바라보는 그런 심정. 왜 거기서 헤어나오질 못했던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나는 창 안에 있다는 생각을 못 한다. 내 마음은 항상 가난한 것 같다.
성경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복이 있다는 생각도 할 줄 모른다. 이처럼 남의 집 창 안을 부러워하면서 살다 가는 것이 삶이라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겁이 날 지경이니까.
찜통처럼 무더웠던 여름. 아침부터 저녁까지 손녀딸을 첼로 캠프에 데리고 가 보내면서 내가 잃고 있었던 어떤 한 부분을 찾은 듯도 싶었다.
신나고 좋아라 웃어대는 애들의 모습, 선생들의 격려와 칭찬, 둘러선 부모들의 갈채와 희망, 그 속에서 아이와 음악은 함께 숨쉬며 즐기고 있다. 부러웠다.
일곱 살은 오래전 흘려보낸 몸이지만 마음은 이제야 나의 일곱 살을 되씹고 있는 건가? 그런 할매를 위해, 나는 그 할매에게 작은 선물을 선사했다. 내가 내 손에 쥐여준 것, 나의 퉁소다.
나는 음악의 으짜도 모르는 음치요 까막이다. 퉁소와 악보 있다고 인생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님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나도 ‘버킷 리스트’ 하나 정도는 더 늦기 전에 해결해 보자는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누구나 하모니카는 부니까, 누구나 피리는 부니까, 누구나 퉁소를 입에 대면 얼마 후엔 구성진 음률이 흘러나오니까. 물론 절로 나오지 않을 것은 알았지만 어떤 종류의 무슨 땀이 배어 들어가야 기대치의 답이 나오는가 하는 것까지는 제대로 생각해 보질 못했던 셈이다. 뚜우뚜뚜 몇 번 해 보려고 퉁소를 사지는 않았다. 나름대로의 계획과 실현책은 약간, 어렴풋이 머릿속에 그리고 시작하긴 했지만.
나는 악보를 도레미파…하는 흥얼거림과 같이 읽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이 퉁소라는 놈의 악보를 보니 (모든 악보가 다 매한가지겠지만…) GABC하며 나가야 한다는 것이 여간 헷갈리는 게 아니다. 비지땀 흘리는 퉁소와의 씨름 끝에, “아 드디어 ‘반짝반짝 빛난별’ 정도를 마스터 했다. 이만하면 그래도 만족이다. “내일은 다른 노래 배우자” 하며 쥐나는 손가락과 팔을 이불 속에 넣고 퉁소쟁이가 된 꿈을 꾸며 잔다.
다음 날 아침, 웬걸! A 구멍이 어딘지, B 구멍을 막아야 하는데 왜 자꾸 C 구멍으로 손가락이 가는지 알 길이 없다. 밤늦게까지, 잠자면서까지 구멍들을 손가락으로 찾아다니며 잠이 들었건만!
친구한테 내 고민을 호소했더니 왈, “옛날 말 틀린 것 봤어? 그러니까 늙은 개한테 새로운 재주 가르칠 수 없다는 소리 하는 거 아니겠니?”
“격려는 못 해줄 망정…쯧쯧” 하고 말았다.
“넌 자꾸 너 자신을 일곱 살인 줄 착각하는 게 문제야. 일곱의 열 배도 넘은 주제에. 냉수 마시고 정신 차려.”
친구 말이 맞나? 내가 어쩌자고 이 나이에 퉁소 붙들고 진땀 흘리는 걸까? 나뭇잎은 툭툭 떨어지는데.
마음의 창. 따스한 노랑불이 켜져 있는 창. 그 창 안 어딘가 엔 내 자리도 있을듯 싶건마는. 내가 설 자리도 있을듯 싶건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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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혜 맥클린,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