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판사’ 역할 해야 할 부동층

2016-09-28 (수)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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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최대의 정치 쇼’가 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 열린 대선 첫 TV토론은 소문 난 잔치에 먹을 것 별로 없다는 사실만 확인시켜준 채 끝났다. 당초 전망대로 이날 토론은 수퍼보울에 버금가는 많은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끌어 모았다. 하지만 토론에서 오간 내용은 이런 뜨거운 관심과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무난하게 끝나기는 했지만 스펙터클한 순간이나 유권자들의 열정을 불러 일으킬만한 발언은 없었다.

하지만 이날 토론의 승자는 분명 힐러리 클린턴이었다. 클린턴은 침착한 태도와 정책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보였다. 전문가들 평가에서는 완승을 기록했으며 유권자 평가에서도 판정승을 거뒀다. 클린턴은 승기를 잡은 셈이 됐으며 도널드 트럼프로서는 갈 길이 아주 급하게 됐다.

현대정치는 ‘미디어크라시’라 부를 정도로 미디어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그 가운데 TV토론은 미디어 선거의 꽃이라 부를만하다. 그러나 정작 TV토론이 선거 결과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 후보자들이 TV토론을 벌이기 전에 이미 많은 유권자들이 지지후보를 마음에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뇌는 익숙한 것에 좋다는 딱지를 붙이고, 좋다고 생각되는 것에는 합리적인 이유를 갖다 대려 한다. 일단 어떤 생각이 자리 잡으면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새로운 증거를 열심히 찾으려 드는 ‘확증편향’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권자가 일단 자기의 지지후보를 결정하고 나면 좀처럼 이를 바꾸지 않는다. 설사 TV토론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형편없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26일 토론에서 클린턴이 우세를 보였음에도 표심변화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TV토론은 후보자들에게 학습동기를 부여해 주고 그럼으로써 좀 더 나은 후보로 만들어 준다는 긍정적 기능이 있다. 그러나 TV토론은 유권자들의 결정을 바꾸게 만들기보다 그런 결정을 한층 더 견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설득효과’보다는 ‘강화효과’가 훨씬 큰 이벤트라는 말이다. 특히 미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이념적 양극화가 극심한 상황에서 TV토론은 합리적 선택을 돕는 길잡이가 되기보다 오히려 이런 분열의 골을 더욱 깊게 하는 역기능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몇 년 전 ‘바른 마음’(THE RIGHTEOUS MIND)이라는 책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 교수는 이런 성향을 “우리는 우리 안에 판사나 과학자가 아닌, 변호사를 발달시켜 왔다”는 표현으로 깔끔하게 정리한다. 우리는 ‘진실’보다 ‘정당화의 근거’를 찾는데 더 뛰어나고 열심이라는 말이다. 유권자들의 마음도 예외는 아니다.

이렇듯 TV토론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크지 않고 제한적이다, 하지만 박빙의 구도 속에서는 단 1%의 변화가 전체 판을 흔들고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힘이 될 수 있다. 특히 이번 대선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부동층이 두텁다는 사실이다. 두 후보 모두를 못마땅해 하는 유권자들이 많다는 뜻이지만,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확증편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유권자가 많다는 건 그만큼 올바른 이성이 작동할 여지가 더 있다는 얘기가 아닐까.

많은 기업들은 26일 TV토론 중계만을 위한 광고를 제작해 내보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아우디 광고였다. 호텔 발레를 하는 남녀 직원이 누가 아우디 RS7 럭서리카 주차를 할 것인가를 놓고 다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음 드라이버를 현명하게 선택하라”는 슬로건을 내보냈다.

유권자들은 앞으로 두 차례 더 TV토론을 지켜본 후 누구에게 국정운영의 키를 넘겨 줄 것인가를 결정하게 된다. 전례 없는 혼란 속에 전개되고 있는 이번 대선에서는 올바른 이성의 작동이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요구된다. 유권자들. 특히 아직 지지후보를 결정하지 않은 부동층은 냉정하게 판결을 내리는 판사의 마음으로 두 후보의 공방을 지켜봐야 한다.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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