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끼’

2016-09-13 (화) 08:08:45 김성혜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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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유럽 갔다가 지난주에 왔어요.” 열한 살짜리 손자의 친구 알렉스한테 방학 잘 보냈느냐고 물었더니 그 애의 답이다.
“그래? 유럽 좋던? 특별히 재미있는 일 있었어?”
“엄마 고향이라서 해마다 가니까 의레 그러려니 해요. 그래도 돈벌인 좋아요.”
“엉? 돈벌이? 무슨 일 해서 돈 벌었는데?” 놀란 내가 되물었다. 유럽은 돈벌이가 미국만큼 녹녹지 않은 곳이다.
“바이올린요.”
“바이올린으로?” 나는 더 놀랐다. 알렉스가 우리 손자하고 같은 바이올린 선생한테서 레슨을 받고 있어서 서로 친하게 된 것은 알지만, 악기 갖고 돈을 벌 정도로 뛰어난 줄은 몰랐다. 솔직히 나는 음악 하면 으짜도 모르는 문외한이다. 그러나 바이올린으로 돈을? 알렉스나 내 손자가 켜는 바이올린 소리가 내 귀에는 그게 그건데 말이다. 무슨 연고가 있겠지 싶어 더 물었다. “그래 얼마나 벌었어?” 치사한 질문이긴 하지만 열한 살짜리니까 얼마 벌었냐고 물었다 해서 중범은 아니겠지 싶어 염치불구하고 말이다. 잘해 봤자 10 불 아니면 20불이겠지 생각하면서.

“아마 달라로 치면 200불 좀 넘었을 거예요.”
“뭐? 뭐라고?” 내가 소리쳤다.
“200불요. 작년엔 200불 안돼요.”
“엉? 작년에도?”
“예.”
“넌 해마다 유럽에 돈벌이 가니?”
“그게 아니고요, 엄마네 가족이 유럽 살고 계셔서 매년 가는데 가서 심심하니까 동네 네거리에 나가 바이올린 켜요. 그러면 사람들이 서서 듣고는 제 바이올린 통에 돈을 주고 가지요. 그렇게 번 거에요.”
“야, 그거 좋은 돈벌이다. 내년엔 나도 같이가자.” 내 손자도 부러운가 보다.
“내년까지 기다릴 거 뭐 있냐? 이번 주말 우리 동네 지하철역에 가서 해 볼래?” 알렉스의 소리.
“그래도 되냐?” 손자 녀석의 질문.
“안될 거 없잖아?” 알렉스.
“미국사람들은 바빠서 길에서 음악 들을 사람도 없고, 짜서 돈 줄 사람도 없을걸.”
“그럴지도 모르지.” 알렉스의 말. “그래도 우리 한번 해 볼래?”
“그래. 맞다. 누가 알아? 둘이 같이 듀엣 해 봐.” 내가 꾀었다.
“우리 해 보자.” 둘은 신 난다고 덤벼든다.

나도 참 알 수 없다. 전에도 알렉스를 두어 번 본 적이 있지만, 녀석이 바이올린 갖고 돈 벌었단 소리 하기전 까지는 그 애한테 특별한 관심 없었다. 돈벌이했다는 바람에 난 그 애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 한 거다. 그도 돈의 위력인가? 며느리의 말이 생각난다.
“바이올린 경연에 나가면 알렉스는 늘 일등해요. 우리 아이와 수준이나 기교는 비슷해도 말이죠. 눈 감고 들으면 둘이 비슷한데 눈 뜨고 보면 알렉스한테 점수 주게 돼요. 걔는 얼굴 표정은 물론 온몸으로 음악을 표현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듀엣 하는 둘을 관찰했다. 며느리 말이 옳다. 기교에서는 비슷해도 표현방법에서는 아이와 어른의 차이다. 알렉스는 어떻게 저렇게 어린것이 표현력이 저리도 풍부한 것일까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종종 우리는 연예인을 두고 끼가 있다, 뛰어나다 소리를 한다. 어쩌면 알렉스가 바로 바이올린에 끼를 타고 난 것인지도 모르지.
혹시나 싶어 나는 내 뒤를 자꾸 살핀다. 내게도 무슨 끼 하나쯤은 숨어 있지 않나 싶어서. 여름도 가고 꿈도 갔건만 여인네 미련은 어쩔수 없나보네.

<김성혜 맥클린,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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