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은 안 먹어도 괜찮다고 뇌가 인식한다. 혈압약은 건너뛰며 아예 잊는다. 내가 혈압 높은 사실도 같이 잊는다. 술은 그런 것이다.
김진선의 작품.
나는 다른 날보다 일찍 가게 문을 닫고 차에 올랐다.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어제 과음한 숙취가 온종일 이어졌다. 그때까지 나는 자동차 관련 사업을 했다. 정비와 중고차를 매매했다. 경기는 엉망이었다. 10년째 같은 비즈니스를 하며 요즘처럼 힘든 기억이 없다. 크고 작은 변화가 없진 않았으나 그래도 꾸준했다. 요즘 같은 불황은 최악이었다. 911 이후부터 그랬다. 이래저래 골치 아팠다. 스트레스 핑계로 술 마시는 날만 늘었다.
집을 향해 출발한 지 5분 정도 지났다. 친구 에릭에게 전화가 왔다. 저녁같이 하자는데, 마음은 이미 귀찮은 생각을 했다. 다음으로 미루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낮술 했어.
-무슨 술, 나 지금 퇴근하는 길, 돈 주고 마시래도 못 마신다.
-아니 근데, 목소리는 많이 취했는데.
-농담하지 마.
통화를 마치고 서둘러 달렸다. 길이 이상했다. 차선이 흔들렸다. 운전대를 맞추면 자꾸 한 쪽으로 휘어지고 휘어졌다.
힘들게 집에 도착했다. 현관을 오르다 발을 접질려 넘어졌다. 왜 그러지 오늘, 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내가 차려준 냉면으로 저녁을 마치고 소주 반병 마셨다. 아픈 머리 진정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점점 더 머리를 죄는 통증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까지 아픈 통증과 차원이 달랐다. 망치로 두개골을 깨는 듯했으며, 수만 개 바늘이 쉬지 않고 찌르는 듯했다.
그 와중에 대변이 마려웠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발자국 옮겼을까. 옆으로 넘어졌다. 왜 넘어졌는지 모르게 넘어졌다. 아내가 다가왔다.
-왜 그래 당신.
-아냐 발을 헛디뎠어.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병원은 무슨, 아무렇지도 않아.
나는 술 때문이라 생각하고 힘들게 일어나 다시 화장실로 향했다. 다시 또 주저앉았다. 불안한 눈빛으로 다가온 아내의 부축을 받고 화장실에 도착했다. 깨질 듯 아픈 머리는 여전했으며 뭔가 홀린 것처럼 멍했다. 어떻게 대변을 보고 두루마리 감으려는데 잡히지 않았다. 다시 잡으려고 왼손을 뻗었다. 잡히지 않았다. 왜, 안 잡히는지도 모르게 다시 또 정신이 멍했다. 그 순간 나는 중심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쓰러지며 쓰러지지 않으려는 무릎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 머리가 벽에 부딪혔다. 쿵, 소리가 났다.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입에서 구토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내가 뛰어들어 왔다. 아내 손에는 전화기가 들려 있었으며 911과 통화하고 있었다. 나의 긴 머리는 구토물과 섞여 엉망이 됐다. 뒤처리 못 한 똥은 아내지만 부끄러웠다. 아내가 물수건으로 얼굴과 머리를 닦아줬다. 정신은 있었으며 말은 조금 할 수 있었다. 사실인지 모르나 나는 분명히 말을 했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풍선 꺼지듯 온몸이 푹, 꺼졌다.
15분 만에 구급요원 둘이 도착했다. 가위로 옷을 자르고 발가벗긴 몸으로 나를 들것에 올려 구급차에 옮겨 실었다. 나는 그때까지 머리가 너무 아파 머리를 어떻게 좀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것은 머리를 열어 어떻게 해달라는 심정이었다. 구급차가 사이렌 울리며 달리는 느낌이 왔다.
그들은 병원과 말을 주고받으며 내게 무언가 했다. 어느 순간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좋아도 아주 좋았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한 즐거움이었다. 아니 쾌락이었다. 그렇게 고통스럽던 느낌은 사라지고 기쁨만 충만했다. 술 취한 기분과 흡사했으나 100배는 더 좋았다. 내게 이름과 소셜번호를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그들은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나 나는 대답했다.
곧 주위가 깜깜해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알 수 없는 상황에 차분했다. 이상할 정도로 아늑했다. 주위가 조금 환해졌다. 그건 노란색과 흡사했다. 아메바 모양의 희미한 형체만 슬로비디오처럼 느리게 멀어지는데…무슨 소리가 들렸다. 주위는 환했다. 은빛 불덩어리 하나 느리게 흔들렸다. 다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어지러웠다. 얼굴 하나 다가왔는데 커졌다 작아짐을 반복했다. 다시 또 무슨 소리가 들렸다.
-나 누군지 알겠어.
-?-여기 병원이야, 당신 조금 아파 입원했는데 이제 다 나았어.
-?-나 누군지 알겠어.
아내였다. 아내의 목소리였다. 동굴을 통과한 소리처럼 울려 들렸으나 분명히 아내의 목소리였다. 구급차에 실려 온 일주일 만이다. 약물을 서서히 줄이며 나는 깨어났다. 몽롱했다. 빈혈과 비슷했다. 보고 들리는 건 모두 흐릿했으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하얀 천장에 아지랑이 건너다녔다. 형광 불빛은 느리게 움직였다.
나는 구급차에 실려 오며 의식불명에 들었다. 80%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이틀을 버텼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다시 이틀. 다시 또 반 혼수상태로 3일을 더해 눈을 떴다. 터진 부위가 워낙 위험한 부위라 머리를 열지 못하고 오른쪽 이마 위 구멍을 뚫고 약물로 치료했다. 60cc 혈액을 뇌수에 쏟았다. 운이 좋아 출혈을 막고 뇌압과 혈압은 안정을 찾았다. 이제 죽지 않을 확률이 거꾸로 80%로 높아졌다. 반병신으로 살든, 온 병신으로 살든.
목구멍에 굵은 산소 호스가 들어 있었다. 귓구멍만 빼고 구멍이란 구멍은 호스로 연결돼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항문과 성기에도 그 구멍 크기의 호스가 연결돼 있었다. 팔, 가슴, 다리도 주렁주렁 링거와 약병 여러 줄이 화면과 연결돼 있었다. 중환자실 RN(등록된 정 간호사)은 8시간 3교대로 나를 지켰다. 그 외 여러 종류의 간호사들이 다녀갔다. 화면의 신호가 불규칙하면 수시로 방을 들락거리며 무언가 했다. 아내는 24시간 나를 지켰다.
왼쪽은 마비됐다. 변한 상황에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차분했다. 차분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약 기운이 나를 누르고 있었다. 뇌의 출혈을 막기 위해 투여한 약물이 24시간 링거와 함께 몇 병은 언제나 달려있었다. 온몸이 약품화 되는 느낌. 눈물 한 방울도 약 냄새가 진동했다.
목에 낀 산소 호스가 숨을 좨, 한 번은 오른손으로 잡아 뺐다. 소동이 있었다. 그 후로 나의 오른발과 손이 침대에 묶였다. 이제 왼손이 호스로 향했으나 마음뿐이었다. 목구멍에 낀 호스는 큰 고통이었다. 목젖을 움직일 수 없는 이유 하나만으로 발작이었다. 교수형을 당하는 기분이 이 기분일까 의심했다. 곧 숨넘어갈 상태로 끌고 가는데 그것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살아오며 겪은 가장 극심한 고통이었다. 머리 아픈 통증은 양반이었다. 뇌에 충분한 산소를 공급해야 뇌세포의 사망을 줄일 수 있다는 이유가 이런 인내의 한계일 줄이야. 그땐 이보다 더한 상황이 곧 전개되리라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마비된 왼쪽 통증이 점점 커졌다. 피부에 닿는 물체가 살을 도려내는 듯했다. 드디어 왼쪽 팔과 다리에 고무 스타킹 비슷한 것이 감겼고 가슴에 붕대를 감았다. 발목에 압축 이완기가 24시간 움직였다. 소변은 마렵지 않았다. 오줌통에서 소변을 직접 빼가는 호스가 요의(尿意)를 그냥 통과시켰다. 하지만 대변은 변의(便意)를 느꼈다. 링거와 약물만 받은 몸에 똥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에 의아했다. 반액체 상태로 빠져나가는 듯했다.
하루에 한두 번씩 좌우로 굴리며 등을 닦아줬다.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어느 여인의 손길인지 부드러웠다. 나는 감정을 조절하는 우뇌의 신경세포에 가장 심한 손상을 입었다. 노래를 잃어버렸다. 좋아하는 음악을 할 수 없다는 사형선고였다. 감정이 말하는 희로애락은 뒤죽박죽됐다. 내가 알고 있는 대상은 대부분 부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죽지 않는다.’는 가능성만 줄기차게 긍정적이었다. 왜 그런 자신감이 생겼는지 나는 모른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폐렴이 왔다.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다. 안쪽이 문제였다. 그러니까 뇌출혈로, 식도와 폐의 마비가 같이 오는 환자가 있다. 그게 바로 나였다. 우리말로 ‘삼키는 장애’이다. 치명적인 후유증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다. 뇌출혈로 의식을 회복하고 폐렴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절반이 된다는 통계. 동생에게 들었다. 스친 이야기지만 뇌리에 깊이 박혔다. ‘알면 불안하고 모르면 용감하다.’ 는 말은 맞다. 모르고 지나가야 도움이 될 때가 분명히 있다. 병원이 그 중의 하나다. 나는 그때 당연히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정도로 알고 있었다. 담담했다. 그들은 위험성을 내게 전혀 얘기하지 않았다. 세일즈맨이 물건의 단점은 알아도 상대가 묻기 전에 얘기하지 않듯, 장점만 말하듯. 일종의 사기인데, 통했다. 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뇌출혈에 관한 사전 지식이 없었다. 어떠한 상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있어도 나와 무관한 먼 얘기로 들었을 것이다. 하여 100% 완벽하게 통했다. 사기당했다.
기침을 시작했다. 폐 안쪽 깊숙이 곪은 가래가 올라왔다. 가릉, 대진 않았으나 양이 늘기 시작했다. 간호사가 기계에 달린 흡입호스를 목에 들이밀고 하루에도 몇 번씩 뽑아냈다. 기침은 농구공 튀어 오르듯 가슴을 터트리며 새우처럼 말려 한 번씩 침대 위로 튀어 올랐다. 죽을 맛이다. 소리는 주위를 깨트리며 병원 복도에 울렸다. 목구멍은 만신창이 됐다. 갈라지고 찢어졌다. 고열에 목구멍에 가해진 통증은 이전의 아픔은 저리가라였다.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는 것인가. 기침할 때마다 눈물이 흘렀다. 병실의 신호음은 나 몰라라 화면에 일정했다.
통증은 감기몸살로 앓아누운 목의 100배는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혈관을 통해 폐를 썩히지 않으려는 항생제가 24시간 흘러들었다. 기침은 점점 심했다. 한 번 기침하면 침대도 같이 공중에 날아올랐다. 목에 가해지는 압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입원 중 최고 고통이었다. ‘죽고 싶다.’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했다. 물은 스펀지에 적셔 조금씩 씹어 먹었다. 마비된 식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폐로 들어갈 확률이 높다는 이유였다. 간호사가 늘 옆에서 도와주고 지켜봤다. 그때 나는 호스로 물을 위에 넣어주면 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병원은 단 한 번도 그렇게 한 적 없었다.
망가진 목구멍의 목젖은 퉁퉁 붓고 너덜너덜했다. 말은 할 수 없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모깃소리처럼 앵앵거릴 뿐이었다. 의사 표시에 필요한 소리의 꼬부림은 어림없었다. 모음으로 ‘아, 으, 음’ 대화했다. 여러 검사가 이어졌다. 채혈은 매일 새벽 마귀 같은 간호사가 쟁반에 주사기를 들고 나타났다. CT 촬영은 침대가 같이 이동하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둥근 통에 들어가기 전 형광 주사액을 따로 맞았다. 목욕은 누워서 했다. 스페니시 억양의 여인이 정성껏 닦아줬다. 참 좋았다. 행복했다. 즐거운 병원 기억 중 하나이다.
나를 담당했던 의사는 둘이었다. 여자와 남자, 친절했다. 남자는 백인이었다. 40대로 보였다. 그를 보면 힘이 났다. 왼쪽 무릎을 작은 망치로 두드렸다. 목구멍과 혀의 모양도 늘 관찰했다. 그는 내게 ‘기적’이란 말을 했다. 왜 그런가, 되물으면 구체적인 사실을 들며 나를 치켜세웠다. ‘너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했다. 기분 나쁘지 않았다. 여자 의사는 중국계였다. 30대 후반 정도로 보였다. 얼굴도 예뻤다. 주로 밤에 내게 왔다. 왼쪽 피부의 통증 강도와 지금 투여하는 약의 내용이 바뀌거나 늘고 주는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곧 회복실로 옮겨질 거라는 반가운 소식도 전했다.
나는 신경의 반이 끊어졌다. 급격히 위축된 근육은 이제 세상에 불필요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그것도 반은 폐기해야 하는 고깃덩어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이 아니, 내가 이렇게 나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비참했다. 상대적으로 나의 수발이 되는 병원 관계자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더 친절해 보였다. 예뻐 보였다. 능력 있어 보였다. 아내가 곁에 있어 고마웠다. 든든했다. 소중했다. 생각도 생존에 필요한 형태로 바뀌었다. 더 낮아지고 더 불쌍해졌다. 가만있어도 불쌍한데 더 불쌍해졌다.
폐렴은 안정에 접어들었다. 가래는 계속 넘어왔으나 기침이 줄고 열도 가라앉았다.
체중이 급격히 줄었다. 왼쪽 근육도 무너졌다. 중환자실에서 거의 3주를 링거와 각종 약물로 버텼다. 나의 기초 체력은 바닥났다. 정신만 또렷했다. 정신이란 생각이었다.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나 미래의 상상으로 현실을 피했다.
나의 몸속을 통과하는 핏줄은 모두 가늘어졌다. 뇌출혈 시 나를 살리기 위한 몸의 자구책이었다. 발기능력은 상실했다. 섹스가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거의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멍했다. 음악을 관장하는 신경 세포도 끊어졌다. 리듬만 조금 살았고 멜로디와 화음은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애국가는 노래로 기억하나 음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시나 수필로 읽히는 것과 비슷했다. 여전히 왼쪽 근육은 급격히 퇴화했다. 감정을 관장하는 신경계와 또 다른 신경계에 이상이 왔다. 모든 사물이 이전의 느낌과 다르게 변했다. 왼쪽 손과 발에 끊임없이 꽁꽁 어는 통증이 생겼다. 이제는 ‘달마처럼 벽면 수행하며 살아라.’ 는 말이었다. 차분했다. 그래도 차분했다. 나도 모른다, 왜 차분했는지.
생각이 많아졌다. 한곳에 모이면 분노로 이어졌다. 뇌는 정신병과 간질의 발병을 무시할 수 없는 구조로 변했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개조됐다. 체중은 30파운드 이상 줄었다. 더 줄어들고 있다. 냄새도 거슬렸다. 이를테면 음식 냄새, 약 냄새, 어둠의 냄새, 등. 병원 냄새가 하루아침에 싫어졌다.
이틀 후면 회복실로 이동한다. 그 후 얼마나 더 병원에 있어야 할지 모르나 ‘회복’이란 단어. 긍정적인 신호인 건 분명했다. 나는 회복실로 옮겨 졌다. 중환자실 3주에 30년 늙었다. 생각이 늙고 몸이 늙었다. 생사의 사선을 넘나들며 얻은 훈장이었다. 침묵이 생겼다. 천장의 사각형 안에 무수한 그림이 생겼다. 밤과 낮 구별 없이 사람, 산, 바다, 강, 트럭, 바람, 꽃, 아이들, 아내, 나, 그리고 또 다른 내가 수도 없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회복실은 어수선했다. 담당 간호사와 의사도 바뀌고 병실 분위기도 바뀌었다. 바뀐 분위기 적응도 하기 전에 나는, 내일 이사한다는 통보부터 받았다. 무슨 일인가. 멍했다. 이사, 병원이 이사한다고, 생소했다. 아니 신선했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뭔가 새로움이 기대됐다. 사실 이 오랜 건물, 바퀴는 못 봤으나 바퀴 냄새가 났다. 잘 됐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회복실 간호사와 의사도 싹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온몸에 메너리즘이 줄줄 흘렀다. 내게 뭐라 얘기하는 것도 책임처럼 보였다. 의무로 채워진 얼굴이었다. 기계에 가까웠다. 사람 피부를 가진 일하는 기계였다. 그러니까 말투며 걸음걸이 감정이 없어 보였다. 중환자실과 적잖은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S급에서 갑자기 C급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구급차가 다시 사이렌을 울리며 나를 태우고 달렸다. 화장실에서 쓰러지던 날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누군가 나를 위해 길을 양보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저들은 사이렌과 번쩍이는 불빛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나도 그렇게 비켜섰지. 잠시 차분했었지. 저들도 그럴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새 병원에 도착했다. 능숙하게 나를 옮겨 내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새 건물 냄새가 났다. 사방이 반짝반짝했다. 우리는 8층에서 내렸다.
새 병원은 주와 오로라시, 필 앤스츄츠가 합동으로 짓고 있는 병원이었다. 필은 그때까지 콜로라도 최고 갑부, 최대 기부자였다. 병원은 최첨단 현대식 건물이었다. 골프장과 기숙사를 같이 끼고 있는 피치먼 넓은 부지에 30년 계획으로 지으며 일부가 완성됐다. 나는 1차로 옮겨 졌다. 운이 좋았다. 의료기기도 최신형 새것이었다. 같은 기계음도 예뻐 보였다. 아내가 좋아했다. 여자는 분위기에 약하다. 그 와중에 엉뚱한 상상을 했다. 어제 중환자실에서 나온 반송장이 여행 온 듯 잠시 착각에 빠졌다.
병실은 정말 호텔처럼 깨끗했고 정돈이 잘 돼 있었다. 간호사와 의사도 젊은이들로 다 바뀌었다. 데라피스트들은 한 남자만 빼고 모두 여자였다. 콜로라도 주립대 대학원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모두 예뻤다. 딱 한 명만 제외하면. 여전히 나는 주렁주렁 호스와 링거를 달고 808호실 주인공이 되었다.
밖은 5월도 하순을 향했다. 한결 꽃냄새가 났다. 하늘은 봄바람이 구름을 몰고 다녔다. 아내는 이틀에 한 번 나와 같이 밤을 보냈다. 나의 왼쪽을 주무르거나 사랑한다는 말을 유난히 많이 해 줬다. 평소와 달리. 곁에는 늘 성경과 좋은생각, 백석의 시집이 놓여있었다. 읽지 못했으니 폼으로 있었다. 그때 담은 사진은 내가 세상의 모든 고민과 아픔을 다 지고 가는 성인으로 보였다. 마지못해 찍은 사진,‘사진은 나의 1%가 다른 나의 99%를 만든다.’ 겉보기는 좋았으나 마음은 허전했다.
링거를 줄이며 음식이 들어왔다. 초록 젤리였다. 오랫동안 빈속에는 그게 순서라는데. 씹는 거 삼키는 걸 잃어버린 나는 도대체 식욕이 돋지 않았다. 억지로 한 점 받아넘기고 기침부터 했다. 물은 하루에 열 바가지 마셨다. 의무적으로 마셔야 했다. 이젠 나의 몸을 물로 채우겠다는 듯했다.
저녁 8시쯤 됐다. 조용해지는 시간이다. 나의 병실 문은 열려있었다. 누군가 복도를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내 방문을 향해 곧장 들어왔다. 진한 자주색 옷을 입었다. 두루마기 비슷했다. 얇아 보였다. 간호사 같진 않았다. 나는 그때 마비된 왼쪽 피부가 꽁꽁 얼어 있었다.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능숙하게 내 왼쪽에 누웠다. 여자도 남자도 아니었다. 인종도 구분할 수 없었다. 흑인, 백인, 황인 어디에 속하지 않았다. 나이는 30대 후반 정도. 사람이란 사실만 나는 인식했다. 나는 그때 병원 ‘특별 도우미’ 정도로 생각했다. 나처럼 마비된 환자를 주무르며 같이 잠을 자는 그런.
그는 나의 왼쪽 팔과 다리를 누워서 주물렀다. 부드러웠다. 강력했다. 시원했다. 뭉친 그 무엇이 풀어지듯 하나하나 풀렸다. 따듯했다. 통증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나의 아픈 곳을 찾았다. 거짓말처럼 멀쩡했다. 졸음이 몰려 왔다. 그렇게 나는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숙면했다.
아내가 아침 일찍 내게 왔다.
-어서 와.
-잘 잤어.
-음, 잘 잤어. 간만에,-다행이야.
-누구야, 어젯밤 내게 온 그 사람.
-누구라니.
-내 왼쪽을 주무르며 내 왼쪽에서 같이 잔 사람. 병원 그 사람,-뭐라구, 여기 그런 사람 없어. 당신 꿈꿨어,-뭐 꿈.
아내와 대화에서 뭔가 잘못됐음을 알았다. 왼쪽은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졌다. 조금 움직일 수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친구 에릭이 왔다. 정통 중식 오리고기 몇 점 사 들고 왔다. 냄새는 맡을 만했다. 싫어야 정상인데 싫지 않았다. 아내가 잠깐 나갔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 조금 나눴다. 몰래 데이트 이야기부터 씹을 만한 놈은 하나하나 잘근잘근 씹었다. 신났다.
-몸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
-뭐, 저승 염라나 예수 비스므리한 형상이라두.
-어젯밤에. 이러쿵저러쿵,-그거 개꿈.
그는 한 30분 나불대다 돌아갔다. 아내가 다시 들어왔다.
-그게 무슨 말인데, 당신 침대는 1인용인데 어떻게 성인 둘이서.
-남녀는 가능하잖아.
-이이가.
-나는 분명 봤다구.
-말을 했어.
-아무 말도.
-꿈이야.
셋째 동생과 제수씨가 들어왔다. 우리 집안 제일 할렐루야이다. 기도는 방언으로 시작 방언으로 끝난다. ‘으다다다 으다다다’ 버는 돈은 각종 이름으로 헌금기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늘 나의 믿음을 의심하는 그들이다. 가끔 내 말에 가자미눈을 뜨고 거품을 문다. 성경 통독이니, 무슨 무슨 기도원을 내 앞에 내려놓곤 했다.
-안녕하세요. 아주버님,-네, 안녕하세요. (힘없이)-형 괜찮아.
-괜찮으면 이렇게 누워있냐.
-뭘 봤담서.
-빠르다. 허깨비,-아주버님 천사예요.
-네, 천사 그렇군요. 천사,-아주버님 저희가 기도해 드릴게요.
-아 네,-…,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허깨비냐, 천사냐, 소동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 다시 밤이 왔다. 나는 이를 악물고 잠을 안 잤다. 혹시 또 그 양반이 올지 몰라서. 그 중성은 오지 않았다. 통증이 다시 시작됐다. 새벽 4시에 채혈을 마쳤다. 가늘어진 혈관을 찾지 못해 여러 번 찔러야 했다. 매일 그랬다.
나는 일과 술이 일과였다. 낮엔 일, 밤엔 술이었다.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지며 체중이 늘었다. 주량도 같이 늘었다. 나는 그때 사십 중반을 통과하고 있었다. 움직임도 둔해졌다. 살이 찌면서 옷도 다시 사 입었다. 양복은 물론 속옷까지 둘레를 늘렸다.
뒷목이 뻣뻣했다. 왼쪽이었다. 과식하거나 술잔이 몇 순배 돌면 증상이 나타났다. 심하진 않았다. 기분 나쁜 통증이었다. 평상시는 느낄 수 없었다. 스트레스받으면 가끔 나타났다. 나는 그때 숙취의 한 종류로 알았다.
어느 날 작업장에서 오른쪽 새끼손가락을 다쳤다. 뼈가 보였다. 상처가 깊었다. 임시처방으로 출혈을 막고 병원에 도착했다. 손가락 반이 잘려나간 살점을 소독하고 꿰맸다. 끊어진 핏줄도 이었다. 병실이 정해지고 입원했다. 이유는 손가락이 아니었다. 혈압 때문이었다. 위험 수치의 고혈압. 퇴원하지 못했다.
3일 입원했다. 약으로 혈압을 조절하고 처방전을 들고 병원 문을 나섰다. 혈압 높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혈압으로 입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꾸준히 약을 먹었다. 한결 몸이 가벼웠다. 느낌은 그랬다. 손가락이 아물고 술을 다시 마셨다. 술은 마시면 마실수록 용감해진다. 정말 무식해진다. 취한 감정,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 있을까. 약은 안 먹어도 괜찮다고 뇌가 인식한다. 혈압약은 건너뛰며 아예 잊는다. 내가 혈압 높은 사실도 같이 잊는다. 술은 그런 것이다.
그즈음 만난 여인, 지피와의 거래는 이성으로 발전했다. 이혼녀였다. 3살 연상이었다. 그때 나의 모든 집중은 사업과 그녀가 우선순위였다. 다른 한 편 쪼들리는 사업자금, 속 썩이는 메케닉은 늘 혈압을 높이며 술을 몰고 다녔다. 수리한 차들도 말썽을 부렸다. 보증기간 며칠을 앞두고 되돌아 왔다. 나의 완성차 점검은 느슨했다. 의도적인 고소와 메케닉 실수도 이어졌다. 이 모든 낮의 골치는 밤의 술집과 술집 여인들이 해소했다. 나는 그때까지 술을 즐겼다. 아니다 ‘취하려 마신다.’로 바뀌기 시작했다. 모든 걸 버리고 절로 들 시기였다.
나는 현장 작업에 뛰어들었다. 차는 메이저 보험사 부서진 차 경매에 매주 3곳 이상 찾아다녔다. 돈 될 만한 차를 사기 위해서였다. 가끔 코피가 났다. 코피를 흘린 적 없는데 이상했다. 운전 중에 흐르는 피는 옷과 손, 얼굴을 당황케 했다. 고속 주행 중엔 위험을 감수하고 코피를 닦았다. 아침에 이를 닦다, 코피가 흘렀다. 전날 과음의 이유로 알았다. 무지했으니 이 또한 무식했다. 가끔 가슴을 노크하는 느낌 받았다. 쿵컹쿵컹, 어지럼증이 왔다. 갑자기 찡, 하며 내가 흔들렸다. 곧, 나는 정상이 됐다. 잠깐 찾아온 혼동, 이 또한 술 핑계로 넘어갔다. 빈혈과 비슷했다. 시야에 멀어지는 진동은 왼쪽 눈에 더 오래 남았다.
아내에게 거짓말이 늘었다. 타주 자동차 경매를 핑계로 지피와 여행을 했다. 일을 핑계로 늦게 들어가는 날이 많아졌다. 관계가 깊어지며 점점 나는 대담해졌다. 아이들이 눈에 보였으나 작아졌다. 반 정신이 나갔다. 친구 에릭에게 모든 사실을 알리고 상의했다. 그도 바람을 피우던 중. 우리는 여러 조건이 비슷해 20년 친구였다.
하루는 그녀가 내게 약을 건넸다.
-이게 뭔데.
-혈압약, 자기 혈압이 높아 보여.
-어떻게 알지.
-나는 알아.
-약을 받았다. (먹지 않았다.)만남을 지속하던 지피와 싸움이 잦아졌다. 친구 에릭과 관계를 목격한 날 나는, 그녀와 헤어졌다. 그와도 의절했다. 콜로라도 여름밤, 별들이 낮게 몰려다니는 7월에…나는 병실 침대에서 세 번 떨어졌다. 5주째 접어들며 내 몸의 부착물들이 대부분 제거됐다. 콧속의 산소 호스만 빼고, 대소변 호스도 사라졌다. 대신 간호사가 들어와 도와줬다. 대변은 화장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소변은 예쁜 간호사가 했다. 고무장갑을 끼고 나의 성기를 꺼내 컵에 담았다.
-그 고무장갑 안 끼면 안 되나요.
-장갑은 병원균 감염 예방에 필수입니다.
-이해하는데, 제가 불결한 느낌에 싫군요.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룰입니다.
창피하지 않았다. 우리는 창피한 경계를 넘은 연인처럼 자연스러웠다. 병원은 육체적 부끄러운 관계를 허물었다. 생각해보면 버려지는 똥과 오줌이 내가 그렇게 지키고자 했던 자존이었다. 몸이 털리고 마음이 털린 병원에서 나는 1살이었다.
오줌은 중요했다. 피와 함께 매일 검사했다. 참지 말라는 말을 늘 했다. 다시 몸에 돌면 독이 된다고 했다. 검사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처음엔 10가지 넘는 약을 한 주먹씩 삼켰다. 약은 약으로 좋으나 그 약의 부작용을 예방하는 약이 만만치 않았다. 약을 반으로 줄이며 움직임이 빨라졌다.
휠체어에 앉고 싶었다. 몸을 조금 돌렸다. 고개를 아래로 돌리는 순간 나는 침대에서 바닥으로 수직 낙하했다. 몸을 세울 수 없었다. 오른쪽만 버둥댔다. 남자 간호사가 뛰어 들어왔다. 아프리칸 아메리칸 흑인이었다. 순했다. 대체로 아프리카 흑인들은 착하다. 사업을 통한 오랜 경험이다. 그의 도움으로 침대에 올라갔다. 아직 침대에 일어나 앉을 수 없는 나. 움직임이 늘었다고 침대가 불편했다. 3일 후 나는 다시 또 떨어졌다.
좌우 불균형에 바닥난 체력, 서 있는 자체가 내겐 화엄(華嚴)이었다. 반복 훈련이 나를 세웠다. 이제 걷기 위한 자세는 어느 정도 준비됐다. 시작은 평행봉이 했다. 나는 가운데 들어가 양손을 봉에 의지해 걸음마를 했다. 걷지 못했다. 오른발만 한 뼘, 느리게 앞으로 나갔다. 왼발은 땅에 끌려 반 뼘 움직였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걸어라’라는 뇌의 명령은 ‘걷지 못한다.’는 왼쪽 반대에 무너지며 한없이 눈물이 흘렀다. 뇌출혈로 쓰러지던 날이 생각났다. 화장실 두루마리 감지 못해 쓰러진 그 느낌은 여전히 따라다녔다.
닭똥같이 굵은 눈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데라피스트 엔지가 건네준 수건이 나를 흡수했다. 슬픔과 희망까지 말끔히 흡수했다. 다시 반복해 걸었다. 평행봉이 그렇게 긴지 그때 알았다. 끝까지 가는 데 한나절 걸렸다. 엄마의 손이 아닌 이방 여인의 손을 잡고 가슴에 파묻히며 걸음마를 했다. 엔지는 친절했다. 다른 건 몰라도 데라피 훈련만큼은 훌륭했다.
꾸준히 복용한 간질 예방약을 끊었다. 어려운 결정이었다. 그 약은 강했다. 데라피를 하기 위해 끊었다. 의사도 못하는 결정을 했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기분은 그랬다. 이전에 약간의 간질이 오긴 왔으나 미미했다. 간질로 오인할 수 있는 떨림이었는데 한 10초 정도 빙의에 들었다. 자다가 그랬으니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꿈은 늘 쫓겨도 느렸다.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으니까.
왼발을 끌면서 걷기 시작했다. 평행봉을 나왔다. 목발을 짚고 걸었다. 다시 지팡이로 대체했다. 창밖은 6월 꽃들이 저만치 흔들리며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퇴원을 눈앞에 두고 이런저런 상념에 잠겼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콜로라도 초여름에 세찬 눈보라가 눈 앞을 가렸다.
<문예공모전 단편소설 심사평>
-심사평 / 윤성희 소설가
투고된 소설들을 읽다보면 비슷한 소재들을 만날 수 있는데, 해마다 그 소재들이 달라진다.
다 같이 모여 올해는 이런 이야기를 씁시다하고 합의를 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비슷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건가? 사는 지역도 다르고, 또 쓰는 사람들의 성향도 다를텐데. 이건 미주 한국일보 문예공모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고 다른 소설을 심사를 할 때도 비슷하게 느끼는 일이다.
어쩌면 해마다 비슷한 풍의 소설이 나오는 이유는 소설이 - 아무리 개인적인 서사를 쓴다 하더라도 그만큼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 장르이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공동체의 고민. 공동체의 아픔. 소설 속 주인공도 소설의 세계 안에서는 사회적인 인물이니까. 그래서 심사를 하다 보면 거꾸로 사람들이 이런 부분을 고민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릴 때도 있다.
그렇다면 올해는 어떤 이야기가 많았을까? 올해는 회상톤의 소설이 많았다.
주인공은 대체로 은퇴한 노년이고 어떤 일을 계기로 젊은 시절을 회상한다. 젊은 시절의 배경은 한국일 경우가 많았다. 즉, 미국에 사는 나이든 주인공이 한국에서 보낸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소설이 많았다는 말이다. 그 젊은 시절도 나만의 추억이라기보다는 한국의 현대사와 맥을 같이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나는 의문이 들었다. 주인공들은 왜 가난했던 시절을 다시 회상하는가? 그 회상을 누구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인가?? 모든 세대가 지금 현재에서 다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사라진 것인가.
소설을 쓸 때 회상의 역할에 대해 조금 고민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시간을 민감하게 다루는 장르이다. 그만큼 어렵고 또 그만큼 다양한 기술이 필요하다.
주인공이 과거의 삶을 구구절절 이야기한다고 해서 독자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지 않는다. 작가는 ‘진실’되게 말했지만 독자는 ‘감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루해하는 경우가 많다. 독자가 ‘감동’할 수 있도록 작가는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 회상톤의 소설들을 읽으며 내가 느낀 아쉬움은 바로 저 지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말할 것인지에 대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훨씬 좋아질 소설들이 많았다.
작품을 투고한 모든 분들의 건필을 기원한다.
<당선 소감>
창밖은 초록이 중심에 섰습니다. 6월은 오늘로 일주일 남겼습니다. 온도계는 최고점을 넘나들며 일기예보를 장식합니다. 햇빛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늘을 기웃기웃합니다. 제가 사는 콜로라도 고원이 그렇습니다. 이렇게 계절은 숨 가쁘게 여름을 알리며 제게 기쁜 소식 하나 전했습니다. ‘2016 미주 한국일보 제37회 문예 공모전 단편소설 부문 가작 입선.’ 저는 다시 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년 전, 저는 같은 공모전에서 시 부문 당선 영애를 안았었죠. 과분하게도, 저는 9년 전 정확히 2007년 4월 27일, 뇌출혈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 살아난 사실이 있습니다. 화장실서 쓰러져 의식불명으로 구급차에 실려 갔습니다. 중환자실 3주 포함 42일간 병원 신세 지었습니다. 그 불행이 글을 썼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내게, 꽃에게, 구름에게, 이런저런 글들을. 저는 세상에 나가 육체적인 일을 할 수 없던 시기였습니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글 쓰는 일이 전부였습니다. 마비된 왼손은 늘어뜨리고 오른손으로만 엉금엉금,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썼습니다. 빈방에 혼자 앉아 글을 썼습니다. 약을 한 주먹씩 먹으며 글을 썼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일 나간 시간은 눈물에 핏물이 늘 고여 있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썼습니다. 유서도 남겼습니다.
저는 학창시절 막연히 시인이 되고 싶은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동안 자료로 모아둔 시와 단편 소설 찾아 읽었습니다. 잡지와 신문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장식용 성경책, 읽고 또 읽었습니다. 제 생을 통틀어서 가장 많은 양의 책을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읽은 책의 몇 배는 읽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전화위복, 제겐 그 전화위복 뇌출혈이 꿈을 실현했습니다. 미주 한국일보가 다리를 놓았습니다. 2년 전에는 심사위원 나태주, 한혜영 선생님이. 올해는 윤성희, 은희경 선생님이 그 위에 양탄자를 깔았습니다. 제게 밟고 건너오라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이십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미주 한국일보 창간 45, 47주년을 같이했습니다. 이 또한 개인적으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족한 저를 택해 주심은 더욱더 낮은 자세로 정진하라는 충고로 듣겠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저보다 더 기뻐합니다. 제겐 이 모든 것이 눈물입니다. 고맙습니다. 미주 한국일보와 문예 공모전 관계자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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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광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