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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문예공모 단편소설 가작 입상작]일맥상통

2016-08-31 (수) 03:18:53 김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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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히도 오늘은 매상이 시원치 않았다. 세 번을 계산하고 거스름돈으로

▶ 쓸 잔돈까지 모두 챙겨 넣었는데도 시간은 말도 안 되게 느리기만 했다.

[2016 문예공모 단편소설 가작 입상작]일맥상통

수박의 작품.

출입문 유리로 햇빛이 한가득 쏟아졌다. 조나단은 바깥을 다시 한 번 살피고 계산대를 등졌다. 주방 쪽으로 갈 때면 심장은 알아서 요동을 친다. 한 사람이 간신히 다닐 수 있는 통로 왼편으로 기저귀며 생리대, 비누와 샴푸 등 자질구레한 생필품이 선반 위로 늘어섰고, 오른쪽으로는 과자류를 비롯한 주전부리 일색의 진열대와 아이스크림 냉장고가 길게 벽을 만들었다. 한 계단 올라서면 뒤쪽 화장실과 창고로 연결된 두 평 남짓한 델리코너가 나오고, 그 전에 옆으로 돌아 나오면 델리 진열창부터 출입구까지, 약 10m 정도 되는 매장 한 편에는 냉동식품과 음료수 냉장고가 줄지어 섰다. 손님이 없으니 오순은 분명 진열창의 두꺼운 유리를 통해 가게 안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뭐 해?”예상과 다르게 커다란 도마 위에 펼쳐 놓은 ‘필라주간’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오순에게 조나단이 말을 던졌다. 오순이가 비켜줘야 뒤편 화장실로 갈 수가 있다.

“아직도 빨갱이들이 판을 치고 있으니….”대용량 피클 통 위에 두꺼운 방석을 깔고 앉은 엉덩이는 꿈쩍도 안 하고 몸만 앞으로 슬쩍 숙이는 시늉을 하며 오순이가 중얼거렸다. 기울인 등 위로 다리를 벌려 건너면서, 모른 척 확 밟아버려? 매번 짜릿한 상상이었다.


“거 쫌, 사람이 지나갈 때면 잠깐 일어나던가 엉덩이라도 조금 땅겨야….”오순은 들은 척도 안 한다. 빨갱이는 네가 빨갱이야. 당최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게다가 요즘은 ‘종북’이라는 점잖은 말을 쓴다. 생긴 것만큼이나 입도 심보도 사나운 여자라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조나단은 화장실로 들어섰다. 양변기에 바싹 붙어 지퍼를 내리면서 냉전 기간이 길어질수록 누가 더 손해인가 따져보다가 하릴없이 늘어진 부랄께로 고개를 꺾었다. 개 오줌처럼 ‘쪼르르’ 소리가 멈출 듯 멈추지 않고 감질나게 떨어졌다. 그때였다. 계산대로 내닫는 오순의 발소리가 들렸으므로 조나단은 재빠르게 바지춤을 올렸다.

“이런, 지랄을 하고 있네.”요도에 남아 있던 몇 방울이 팬티 속에서 주르륵 새어 나오고 말았다. 나이 예순 넘어선 지가 벌써 몇 해 전인가, 소변도 편하게 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조나단은 새삼 개탄스러웠다.

“ ? ”오순이가 얼굴 가득 짜증스런 표정으로 육박하는 서슬에 조나단은 벽으로 붙어 섰다.

“아, 몰라 몰라! 저 새끼 제 전화 없어졌다고 지랄이야.”휑하니 주방으로 올라가서는 다시 주간지에 코를 박았다. 입구에는 덩치 하나가 계산대 너머로 고개를 들이밀고 연신 두리번거렸다. 저러다가 금고에 손이라도 넣으면 어쩌려고, 조나단이 혀를 차며 내려섰다.

“무슨 일이야?”가게 앞 사거리에서 마약을 파는 흑인 중 한 명으로, 두꺼운 입술이 오늘따라 더욱 멍청해 보이는 놈이었다. 언젠가는 계산을 하려고 잔돈을 뒤지다가 자기 주머니에 있던 작은 권총으로 자신의 발등을 쏘아서 병원에 실려 간 적도 있었다. 적당히 어르고 달래면서 보내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하긴, 조나단 자신이 쓰는 것과 같은 구식 셀폰도 아니고 몇백 불씩 하는 ‘I phone’이다. 오죽하면 그것들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르겠는가. 맞은편 꼭대기의 모니터에 나오는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CCTV를 돌려보라고 침을 튀긴다. 그러면 간단하다. 하지만 컴퓨터가 고장 나서 녹화가 되지 않은지 두 달이 넘었다. 업체에서 부르는 가격에 망설이다가 오늘까지 왔다. 오순이가 그 문제로 또 시비를 걸면 골치 아프다. 녀석이 들어오는 손님마다 붙잡고 하소연을 하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아까 여자애들 몇 명 있었는데 그것들이 쎄볐는지 모르잖아~. 빨리 내보내! 시끄러워 죽겠네, 정말.”“뭐야 시팔! 빌어먹을 네 와이프가 뭐라고 떠드는 거야?”자신에게 뭐라 그러는 줄 눈치채고 놈이 욕까지 하며 성질을 냈다. 말조심하라고 조나단이 눈을 부라렸지만, 녀석은 물러서지 않았다. 조나단은 할 수 없이 뒤쪽 선반 위에 있는 탁상용 전화기를 내주었다. 자신의 셀폰에 전화를 걸어 놓고, 너 누구냐? 로 시작한 대화는 옆에서 듣기에도 기가 막혔다. 더는 멍청한 표정을 짓기도 힘들었는지 녀석이 수화기에 대고 쌍욕을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상대편이 먼저 전화를 끊은 모양으로 성난 황소처럼 연신 콧구멍을 벌렁거리는 놈이 불안해서 조나단은 얼른 수화기를 거두어들였다.

내용인즉슨, 그 여자는 전화기를 자신이 습득했고 그냥은 못 돌려주니 200불을 달라고 요구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것도 아니고 계산대에서 가져갔으면서 주웠다고 한다. 정 억울하면 경찰에 신고하라는 조나단의 제안에 녀석은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뚱한 얼굴이 되어 바라본다.


마약 파는 놈더러 경찰에게 전화하라고 한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 이야기여서 조나단은 실실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인구 10만 명의 미(美) 동부 소도시, 윌튼 시(市)에서 마약 파는 소굴로 유명한 블룸스트릿 사거리이다. 싸구려 아파트가 밀집해 있고 주민의 90% 이상이 가난한 흑인들, 라틴계와 근처 노숙자 쉼터를 오가는 백인들이 그 나머지로, 다운타운 바로 뒤인 이 근방에서 총기와 폭력사건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터졌다. 가게를 인수할 때만 해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암 수술하고 살아났으면서 총 맞고 싶으냐고 몇몇은 제 일처럼 말리기도 했다. 하지만 수술 뒤에 남은 돈으로는 먹고살기도 힘들었다. 그 전에 했던 피자집과 튀김 가게는 고생으로 얻은 주름 이외에는 건진 것이 없어서 눈도 돌리기 싫었다. 여기저기 융통한 돈으로 이 가게도 간신히 얻을 수 있었다. 살벌한 거리에서 3년간 버틴 결과, 빛도 대충 청산하고 조용한 마을에 아담한 2층 주택을 새로 얻고 중고일망정 폼 나는 브랜드로 두 내외가 자동차도 바꿨다. 4년 전, 5만 불에 들어와서 지금은 13만 불에 넘기라는 사람이 나타나도 팔지 않았다. 입지전적까지는 안 돼도 대견한 인물임에는 분명하다고 자찬하는 조나단이다. 자리가 잡혀갈 즈음에는 사람도 쓰고 하면서 주 1회 나갔던 골프장도 날수를 늘려가며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일하는 사람은 길어봐야 두 달을 넘기지 못했고 으레 그렇듯이 조나단의 몫으로 돌아왔다. 동네 분위기와 거친 놈들을 다루기도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오순의 성질머리에 맞추기가 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더욱 오순이가 자신에게 이러면 안 되는 것이다. 어쨌든, 이 거리에서 약을 파는 놈들은 멀리서 경찰차만 봐도 슬금슬금 피하는 게 당연하고 거리에서 수갑을 차고 경찰차에 오르는 인간들 열에 아홉은 가게의 단골들이다. 그러면 못 보던 얼굴이 나타나서 그 자리를 채우기도 하고 끌려갔던 놈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나타나서 다시 가게를 들락거렸다. 코카인 중에서도 주로 태워서 피우는 싸구려 크랙과 지금은 약으로도 쳐주지 않는 마리화나가 이들의 주요 품목이다. “이이제이”는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쓰는 말이라고 조나단이 떠벌린 적도 여러 번이다. 강도 사건의 대부분은 타지에서 온 놈들이 한적한 틈을 타서 저지르고 도망가지만, 1년 365일 이 골목은 마약 파는 흑인들과 그 가족들이 거리를 지킨다. 물론 뻔질나게 보이는 경찰차와 방탄복에 중무장한 마약 단속반이 한몫하는 건 당연하다. 밖으로 나갔던 놈이 다시 들어오더니 전화기를 요구했다. 이번 통화내용은 거래다. 녀석은 돈이 없다고 사정사정하더니 결국은 130불에 계약을 했다. 종이쪽지에 주소를 적고 나서는 연신 fuck! fuck! 거리며 나갔는데, 실랑이 끝에 70불 깎아준 것이 고마워 저도 모르게 땡큐, 한 것이 분해서였을 것이다. 전화기를 주운? 여자 옆에는 분명 덩치 좋은 남자친구나 오빠가 함께 있을 것이다.

벽시계를 보니 이제 열두 시가 조금 지났다. 녀석 때문에 팬티 갈아입는다는 것도 잊었다. 조나단은 뒤쪽 속옷 진열대에서 이것저것 만지작거렸다. 다시 화장실에 가면 분명 오순이가 한소리 할 것이고, 시도 때도 없이 들어오는 손님들 때문에 이곳에서 바지를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배가 고파서 슬슬 밥을 해 먹어야 할 텐데 개운한 기분으로 먹기는 글렀다. ‘나쁜 년, 밥을 제대로 해 주나 그렇다고….’ 오순에게서 팬티의 얼룩 때문에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몇 번 듣고 나서는 갈아입기 전에 확인하고 자국이 뚜렷하다 싶으면 비닐봉지에 담아서 버렸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뭐 없는 날이 드물어서 매번 버리기에도 아까웠다. 여러 해 전부터 혼자 쓰는 방에 얼룩 있는 것들을 모아 두었다가 발각이 된 뒤부터는 매일 저녁 샤워하면서 입었던 팬티를 빨기 시작했다. 벌써 일 년 전이다.

세탁기 돌리면서 안 보이는 속옷에 대해서 궁금할 법도 한데 오순은 끝내 물어보지 않았다. 매일 저녁 침대에 누워 화장실 손잡이에 축 늘어져 있는 팬티를 볼 때면 세상이 뭐 이런가 싶었다.

양은 냄비에서 거품이 보글거리고 뜸이 들면서 고소한 냄새가 올라오는 때가 하루 중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친구들과 세검정 계곡으로 천렵 다니던 시절과 어머니가 부뚜막에서 짓던 밥이 떠올라 마냥 아릿해지기만 하는 것이다. 며칠 전에 시답잖은 이유로 한바탕 한 이후로는 올라가서 주뼛대는 짓도 자존심이 상해서 아예 계산대 아래 구석에서 라면을 삶아 먹기 시작했다. 오순이가 가계 불낼 일 있느냐며 브루스타를 가지고 올라간 뒤에는 오기가 발동했다. 일 끝나고 월마트에 가서 딱 냄비 하나 끓일 수 있는 전기 레인지를 사 왔다. 내친김에 ‘한국식품’ 들러서 조그만 양은 냄비도 하나 고르고 집에서는 봉투에다 쌀을 담아 와서 해 먹기 시작했다. 누룽지를 긁어서 놔뒀다가 설탕을 솔솔 뿌려 먹거나 숭늉 끓여 먹는 재미는 덤으로 얻은 행복이었다. 왜 이 맛을 몰랐을까? 조나단은 뒤늦은 발견이 자못 억울하기까지 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밥 먹는 거 안 보여?”무릎 위에 두꺼운 잡지를 깔고 올려놓은 냄비를 얼른 손으로 가리며 조나단이 소리쳤다.

“냄새난다고 했잖아!”오순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쏘아붙이며 하던 짓을 계속했다. 냄비 집어 던지는 꼴을 네년이 기어이 보고야 말겠다면 오냐, 해주마! 막 뚜껑이 열리던 참에 오순은 분무식 방향제 뿌리기를 멈추고 올라갔다. 계산대 주위로는 향기로운 석류 향이 진하게 떠돌았다.

“못된 년인 건 알았지만, 정말 너는 썅년이야. 개 썅년 같으니라고.”혼자 중얼거리면서 무말랭이를 입에 넣고 꼭꼭 씹었다. 하도 지랄을 떨어서 엊그제 김치 대신 팩에 든 무말랭이와 단무지를 사 왔다. 냄새가 전혀 안 나는 것은 아니지만, 오순이가 저러는 것이 일종의 주도권을 빼앗긴 순전한 심술이라는 걸 조나단은 안다. 그 잘난 주도권이란 게 무언가? 식은 밥에 계란후라이 하나 던져 넣거나 이제는 입에도 물린 썹(sub)이며 샌드위치가 대부분이었다.

매운 거는 속이 부대껴서 ‘순한 맛 진라면’을 끓여 달라고 부탁 같지 않은 부탁을 해도 일부러 그러는지 두 번에 한번은 오순이 자신이 좋아하는 ‘열라면’이었다.

남은 하루가 너무 길었다. 오늘따라 처조카도 쉬는 날이다. 1년 전에 무작정 건너온 나이 마흔이 가까운 노총각은 무사태평에 놀 궁리만 하는 한심한 인간이었다. 자신보다 오줌 싸고 돌아다니는 곳이 더 많았다. 미국에서 돈 벌기는 애당초 그른 인간이라 생각하면서도 그 딴딴한 종아리를 볼 때마다 질투를 넘어서 은근히 적개심마저 드는 조나단이다. 세상에 자기편은 없었다.

“어쩌면 저 여자랑 저렇게 똑같을까. 패도패도 말 안 듣는 건 완전히 똑같네그래. 허 참!”조나단은 계산대에 비스듬히 기대고 서서 의자에 올려놓은 dvd 플레이어를 보며 혀를 찼다. 오늘 ‘동물농장’의 주인공은 폭력적이고 심술궂은 원숭이였다. 연습장 반만 한 크기의 화면을 바라보며 숨죽이고 낄낄거리다가도 금전등록기 위에 얹어놓은 손거울 보기를 잊지 않았다. 윤가와 통화하는 것 빼놓고 오순이가 제일 싫어하는 짓이 계산대에서의 dvd 시청이다. 언제고 내려와서 시비를 걸지 몰랐으므로 거울에 반사된 델리코너의 낌새를 주시해야 했다. 유비무환이다.

“또 뭐야? 하….”아니나 다를까, 오순이가 엎어질 듯 내려와서 순식간에 문밖으로 사라지는 통에 dvd를 팽개치듯이 치워버린 조나단은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이 자식은 또 왜 실실 쪼개지?’ 1불짜리 작은 씨가를 건네받으며 놈이 조나단을 보고 다시 히죽거렸다.

역시 약 파는 놈으로 키는 작지만, 팔뚝이 조나단 머리만 해서 근육이 대단한 놈이었다. 선글라스며 번쩍거리는 장신구에 항상 말끔하게 차려입고 다니는 뺀질이다.

“좀 나가봐야 할 것 같은데? 네 와이프 또 시작했어.”조나단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오순이가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가는 경우야 흔했다. 대개는 조나단이 한눈을 팔거나 계산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에 슬쩍 물건을 집어넣고 내빼는 조무래기들을 적발했을 때였다. 나이가 많거나 어리거나 좀도둑들은 끊이질 않았다. 근육이 나가느라 문이 잠깐 열린 순간에도 오순의 고함과 쌍욕은 그치질 않았다.

“오 마이 갓! 정말 동네 창피해서 죽겠네. 말을 들어 처먹어야지! 영어도 못하는 게 어디서 욕만 늘어가지고, 저러다 언제 한 방 얻어맞고 말지.”조나단이 툴툴거리며 계산대를 돌아 나와 막 출입구에 다다랐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놀라서 흠칫거리는 조나단을 보고 오순이가 되레 같잖다는 눈빛으로 흘겨보며 내리질렀다.

“앞으로 저 새끼 가게 못 들어오게 해! 쌍놈의 새끼 같으니라고. 10전 20전 모자란다고 해서 매번 깎아 주고, 어제는 라지 사이즈 주문해 놓고 찾아가지 않아서 얼마나 손해를 봤는데, 개새끼가 어디서 감히….”단골 중의 하나가 먹을 것을 우물거리며 지나가다가 오순의 눈에 걸린 것이다. 보아하니 두 블록 아래 조 사장네 집에서 만든 샌드위치일 텐데, 포장지만 봐도 어느 가게 것인지 구별해 내는 거야 그렇다 치고 두꺼운 진열창을 통하고 다시 출입구의 유리문을 통과해서, 지나가는 아이까지 잡아내는 오순이가 새삼 무서웠다. 오늘 하루는 아무 짓도 안 해야겠다는 생각에 조나단은 dvd를 정리했다.

“에이, 이것들이 다 어디로 갔나.”까무룩 졸다가 허방에 빠진 듯 놀라기도 몇 차례, 그럴 때마다 조나단은 부러 목을 돌려가며 중얼거렸다. 델리코너도 잠잠하다. 팔아주지 않기로 약속한 시간이라도 있는 것처럼 발길이 뚝 끊기는 순간이 오늘따라 길었다. 조나단은 거울을 한 번 곁눈질하고 햇살에 먼지가 분분한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무 끄트머리 잔가지가 봄바람에 살살 흔들렸다. 처음 이곳에 들어와서 눈을 마주하고 정을 준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건너편 길가에 서 있는 나무, 작은 벚나무였다. 주변의 가로수들과 확연하게 차이가 났으므로 심은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짐작했다. 하지만 계절이 바뀌고 해가 넘어가도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나무는 자라질 못했다. 성글게 엮은 싸리비를 거꾸로 꽂아 놓은 듯 볼품없는 나무는, 비가 오면 진한 먹색으로 젖었고 눈이 오면 앙상한 가지가 하얗게 떨었다. 때가 되면 구색 맞추듯 매달린 꽃이야 기껏 팝콘 한 봉지 뒤집어쓴 꼴이어서 사람들의 눈길도 받지 못했다. 그래도 그 나무가 좋았다. 온 도시가 비바람에 시달리는 밤이면 침대에 누운 조나단은 문득문득 나무의 안부가 근심이었다. 심심찮게 보이는 도로변에 스러진 커다란 나무들을 지나쳐 평소보다 일찍 가게 옆에 차를 대면서는 절로 흐뭇한 미소가 돌았다. 몇 번인가는 건너가서 쓰다듬으며 용하다는 칭찬도 했다.

나이아가라 폭포가 얼었다는 지지난 겨울도 버티어서 나무는 가지 끝마다 꽃망울이 불그레했다.

“글쎄, 안 된다니까. 너도 잘 알면서….”차로 10분 거리인 갈빗집으로 넘어오라고 ‘윤’이 보채는 중이었다. 아니라고 하는데 오늘 80불 딴 녀석은 소주 한 잔에 들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날씨도 날씨지만 조나단은 무릎 때문에 침 맞으러 다닌 지가 벌써 두 달째고 골프장은 그만큼 나가질 못했다. 그래도 어느 놈이 얼마큼 따고 잃었는지가 매일매일 궁금했다.

윤이 제때 보고를 하지 않으면 몸이 단 조나단이 먼저 전화해서 내용을 듣고 한두 마디 훈수를 두어야 직성이 풀렸다. 이제 오십 중반을 넘긴 윤은, 조나단이 미국 와서 사귄 유일하게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친한 동생이다. 그래서 그런지 오순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윤이기도 했다.

“참이 아니야. 고등학교도 간신히 졸업하고 배운 것도 없는 내가 왜 아는 게 많은 줄 너 알아?”아는 게 많다는 말에 대한 의문인지, 왜 아는 게 많으냐는 물음인지가 애매한 윤의 말투가 귀에 거슬렸지만, 조나단은 말을 이었다.

“소크라테슨지 아리스토텔레스인지가 악처를 만나서 철학자가 됐잖아?”갑자기 헷갈려서 둘 다 열거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도 다 악처 덕분에 반 철학자가 된 거라고.”윤이 킥킥대는 소리를 들으며 조나단이 말을 이었다.

“악처를 만나면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고. 어떻게 인간이 저 모양일까? 나는 왜 저런 여자를 만났을까? 나는 도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음, 삼라만상의 이치가 아주 심오하게 펼쳐진다고. 삼라만상 알지?”꼬맹이가 들어와서 사지는 않고 이것저것 물건들만 집적거리는 게 신경 쓰였다. 손님 상대하면서 전화기 붙잡고 있다가 오순에게 깨진 게 부지기수여서 거울과 아이를 번갈아 가면서 눈을 돌려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고. 내가 위(胃)를 반이나 잘라내고도 이렇게 건강하게 골프를 치고 다니는 것도, 알고 보면 다 악처 덕분이라. 히히.”제 말에 우스워진 조나단이 계속 말을 이었다.

“음, 딴 놈들은 그 스트레스를 참겠지만 나는 그냥 폭발해 버리잖아. 두드려 패니까. 그것도 정기적으로, 한 삼 개월에 한 번씩이지? 그런데 그게 다 나만 좋은 게 아니라고. 생각해 보니까 저 여편네도 덩달아 스트레스가 풀리는 거라니까?”윤의 웃음소리가 너무 커서 반사적으로 위쪽으로 머리가 돌아갔다. 꼬리가 길면 여지없이 밟히고 말았다. 이쯤 되면 끊어야 했다.

“아, 이 사람아, 여자도 맞고 소리치고 하면서 대들 거 아니냐고? 그게 얼마나 스트레스 풀리는 일인 줄 몰라? 싸우면서 맞아 본 적도 없어? 그럼, 그러니까 때만 되면 때려 달라고 아주 사람 속을 뒤집어 놓지.”전화를 끊고 나서 통로 중간에 있는 라디오의 볼륨을 만지는 척하며 위를 보았다. 진열창의 두꺼운 유리도 유리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고깃덩어리며 채소들 사이로 무슨 저격수처럼 눈만 얹어두고 있어서, 오순이가 일하느라 그 볶은 뒤통수를 보이지 않는 이상 뭐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자신과 눈이 마주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나단은 얼른 계산대로 돌아왔다.

밥 먹고 잠시 나갔다가 손님이 밀어닥치는 통에 담뱃불은 붙이자마자 꺼야 했다. 이리저리 눈치 보다가 나갈라치면 손님은 들어왔다. 살기 위해서 끊었던 담배를 왜 다시 피우게 됐던가? 한바탕 난리를 치거나 있는 대로 꼭지가 돌고 나면 담배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주로 오순의 가방에서 주인처럼 빠끔히 대가리만 내밀고 유혹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지년이 안 피우면 나도 안 피웠을 텐데….”금방 들어온 계집애가 뭐냐는 표정으로 쳐다본다. 너한테 한 말 아니라고 하면서 조나단의 시선은 자연스레 레깅스 차림의 아이 몸을 훑고 있었다. 골목에서 낱개 담배를 파는 코끼리의 딸이다. 스모선수를 떠올리게 하는 비대한 엄마와는 달리, 이제 열다섯 살의 아이는 가슴이며 엉덩이가 완벽한 작품이었다. 금발의 잘 생긴 백인 여자들은 근처 다운타운에도 흔했지만, 육감적이고 탄력적인 흑인들에 견줄 바는 아니었다. 흑인 거주 지역에서만 장사한 게 30년인데 왜 기회가 없었겠는가. 약값이나 용돈이 궁해서 다리 벌리는 여자들은 드물지 않았고 노골적으로 흥정하는 어린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미성년자 건드리다가 잘못되면 끝장이다. 남은 인생 미국 감옥에서 숙식하는 문제야 그렇다 치더라도 두고두고 치욕을 안고 살아야 할 딸, ‘제니’가 가장 무서웠다.

언젠가 골프 뒤풀이 때, 게네들 맛이 이러쿵저러쿵 주접떠는 윤에게는 미친놈, 하면서도 나이 여문 것들로 한 번은…. 하기도 했다. 혹시라도 하는 마음에 윤에게서 얻은 비아그라까지 운전석 수납함에 보관 중이다. 하지만 조나단은 끝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양심이라든가 뭐 그런 것들 때문은 아니었다. HIV, 에이즈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꼭 흑인들이 아니어도 옆으로 샐 구멍은 얼마든지 있었다. 군살 하나 없이 훤칠한 키와 나이에 비해 말끔한 피부는 상종하는 인간 중에서 제일 준수하다는 자평에 거리낌이 없는 조나단이다.

빨간색 이북5도민회 모자를 쓰고 단정한 백발에 하얀 콧수염이 나타나면 얼마나 멋지다고 칭찬들인가? 스스로 챙겨 먹는 영양제와 각종 건강 보조제도 암 수술만 아니었으면 입에도 안 댈 물건들이었다. 그렇다면 오순은 어떤가? 조나단이 서울의 이름난 호텔 연회부 지배인으로 있을 때 오순은 같은 호텔 커피라운지에서 일했다. 처녀 적만 해도 아담한 게 유니폼 입은 모습이 그런대로 보아줄 만했다. 고등학교밖에 못 나온 자신보다 전문대학 졸업한 이력이 마음에 들었고, 나이도 여덟 살이나 어린 여자한테 프러포즈를 받았으니 친구들의 부러움은 대단했다.

하지만 식음료부의 주방 아줌마들까지 올라와서 쌍수를 들어가며 말리는 데에는 의아하기도 했다. 여자들의 허튼 시샘으로 여겨 대수롭지 않게 넘긴 것이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 자신이 요구한 것은 단 하나였다. 위에 형님은 몸이 불편해서 어머님은 자신이 모셔야 한다고. 그때 쪽 째진 눈으로 미소까지 띠어가며 어머님 한 분 모시는 게 뭐 어렵나요?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신혼부터 그 유난스런 성질 머릴 발견하고는 일찌감치 갈라설까도 했지만, 배 속에 아기는 이미 들어섰고 때를 놓치고 말았다. 결국, 이러다가는 모두 잃겠다는 생각에 한 살배기 딸을 둘러업고 미국으로 온 것이다. 사람은 성품대로 얼굴이 만들어지기 마련이어서 그 표독스런 얼굴은 30년을 넘게 살았어도 정이라곤 붙지 않았다.

그동안 추파 던진 과부며 이혼녀 교포가 한둘이 아니었다. 근처 카지노에서 오다가다 만난 쪽박 찬 여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중엔 삼삼한 여자들도 없지 않았다. 이심전심으로 통한 적도 있어서 이참에 오순이와 이혼할 상상으로 마음이 들뜨기도 했던 조나단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2년째 영어 강사 노릇 하며 고생하는 외동딸이 역시 마음에 걸렸다. 시집이라도 보내 놓고 나서야 뭘 해도 해야 했다. 조나단은 이것이 피, 종자라고 결론지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스물다섯에 청상과부가 되어 평생을 수절하고 형제를 키워낸 그 힘이, 오순에게서 모진 핍박을 받으면서도 갈라서지 않고 버티게 해 주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서 이것이 어떤 고마움을 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얼른 매듭을 짓지 못했다. 아무튼, 오순이가 자신에게 이러면 안 된다는 데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어구? 꼭 뭐 같네?”“? 이런 제기….”쥐새끼가 따로 없다. 이제는 이력이 붙을 만도 하건만 소리 없이 접근하는 오순에게 매번 놀라는 자신이 싫었다.

“그 왜? 옛날 그림들, 애들 기저귀 개는 여자들 그림 같은 거….”오순은 고개까지 뒤로 빼고 혼자 깔깔거리며 올라가 버렸다.

“뭐야? 무슨 개 같은 소릴 하는 거야?”무릎 위에 있는 것들이 쏟아질까 봐 조나단은 엉덩이만 들썩거리고 말았다. 샌드위치 손님에게 줄 냅킨이 동났기에 페이퍼타올을 한 장씩 뜯어서 무릎 위에 쌓는 중이었다. 졸기라도 하는 줄 알고 내려왔다가 그게 아니니 무어라도 하나 쥐어박아야 성이 풀리는 여자였다.

모든 사단이 방심한 틈을 타서 일어나는 법이다. 등산도 그렇지 않은가? 죽을 힘 다해 정상에 오르고 나서는 꼭 하산하는 길에 엎어질 확률이 높다고 했다. 오늘도 무사히, 아빠를 위해 기도하는 딸의 영상이 조나단의 눈앞에서 시계추처럼 어른거렸다. 조나단은 매출 전표를 뽑고 금전 등록기에 들어 있는 현금을 세며 정산을 시작했다. 오순이도 청소를 끝내고 음료수 냉장고를 채우더니 계산대 바로 옆 과자 진열대로 내려왔다. 은박지와 비닐봉지가 부스럭거리기 시작하면 적의 진군 나팔 소리보다 더 크게 가슴을 압박해 들어왔다. 그래도 정산하고 있을 때는 시비를 걸지 않았다. 불행히도 오늘은 매상이 시원치 않았다. 세 번을 계산하고 거스름돈으로 쓸 잔돈까지 모두 챙겨 넣었는데도 시간은 말도 안 되게 느리기만 했다.

“무슨 떼돈을 벌었다고 그렇게 오래 걸려?”쳐들어왔다.

“확실히 해서 나쁠 거 있나.”어쭙잖은 방어는 뒤늦은 후회뿐이다.

“확실한 거 좋아하네.”오순이 코웃음을 치며 다시 부스럭거렸다.

“야! 확실히 하는 게 그 모양이라서 어린놈이 나한테 대들었니?”부아가 치미는지 진열대에서 두어 걸음 물러선 오순이 조나단을 쏘아보며 따졌다. 언젠가는 날아올 돌멩이였다. 조나단은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누가 뭘 대들었다고 그래?”야, 라는 소리가 거슬렸지만, 언성을 높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지. 그렇게 희미하게 사니까 그 주접으로 사는 거야. 이 멍청아.”오순이 다시 진열대로 쭈그려 앉으며 한심하다는 투로 내뱉었다.

어제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만하면 교회 한 번 나가줄 만도 한데, 종교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싫다’는 조카 녀석이나 끈질기게 보채는 오순이나 오십보백보였다. 조나단은 계산대를 조카에게 맡겨 두고 뒤로 물러나 앉아 신문을 보는 척, 오순과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일본에서 심심찮게 발생하는 지진과 방사능 사건은 우상숭배가 판을 치는 섬나라에 내려진 심판이라는, 어느 목사의 말을 손뼉까지 쳐가며 동조하고 그에 비하면 한국은 얼마나 대단하냐, 이제는 대통령도 훌륭하고 하나님 섬기고 그러니 얼마나 좋으냐고, 그 조그만 나라에서 미국 다음으로 세계에 선교사 파견하는 숫자가 많은 것 너는 아느냐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오순은 흡족한 표정이 되어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조카가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여기저기 나가서 총 맞고 다니잖아.”조나단은 귀가 번쩍 뜨였다. 고개는 가만둔 채로 조카의 어깨너머로 눈동자만 슬쩍 돌렸다. 순간의 정적, 오금이 다 저린 순간이었다.

“뭐? 너는 어쩜, 너는 무슨 애가 만화책 읽듯이 그런 식으로 말하니?”오순이 몸을 홱 돌리더니 올라가 버렸다. ‘저 새끼 하고는 다신 말 안 한다’는 오순의 속말을 조나단은 똑똑히 들었다. 통쾌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자식 봐라? 감히···. 어쨌거나 조나단이 성질나는 것은 다른 이유였다. 벌써 몇십 년을 오순은 호칭 없이 본론부터 이야기한다. 젊어서는 ‘제니 아빠’ 소리도 곧잘 하더니 이제는 그것도 어디 한국 사람들 여럿 있는 데서 자기를 가리킬 때 쓰는 3인칭으로만 쓰인다. 여보, 당신이란 좋은 말이 있어도 이 여자는 당최 말이 안 통한다. 자신의 영문 이름 ‘조너선(Jonathan)’을 꼭 ‘존나단’이라고 발음하는 바람에, 그것도 처음 ‘조’자에 꼭 악센트를 넣어서 그것만은 결사적으로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어서 윤가 놈 까지도 “뭐가 나다 말았나? 조~존나단 형!” 해가며 놀리는 데는 꿰매버리고 싶은 오순의 주둥이였다.

자신도 화가 받치면 누구 못지않게 입이 걸지만, 여자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주변 어디를 봐도 오순이 같은 여자는 없다. 가게에 조카가 없을 때는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야, 멍청이 등이 날라 오고 그러지 말라고 하면 자신은 입버릇이라 바꿀 수가 없다고, 새삼스럽게 왜 그러냐며 오히려 당당하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 새끼도 네가 우스우니까 나도 우스운 거야.”밑에서 얼씬거리는 머리끄덩이를 잡아 흔들고 싶었지만 참았다.

“어른이 어른 같아야 대접을 받지. 하긴, 그깟 시급 몇 불 가지고 장난치는 고모부란 게 어련하게 보이겠어?”“이런 시브랄! 너 닥치지 않을래? 주둥이를 확 뭉개버리기 전에.”시원하게 두들겨 패지는 못했지만, 일주일도 안 됐다. 자신도 점점 힘이 부치는 걸 하루가 다르게 느꼈다. 반면 여자는 갈수록 더 앙칼지고 힘이 좋아진다. 그렇다고 해도 때리면 맞는 건 오순이고 그 역전은 결단코 없을 것이라고 조나단은 굳게 믿었다.

“왜? 또 다 때려 부수고 한 번 해봐!”조나단은 참으리라 다짐했다.

“하라면 또 못 하지. 하긴 말만 앞세우는 인간치고 뭐 변변한 게 하나나 있나?”그래 떠들어라, 10분만 지나면 나는 카지노로 간다. 한 200불 잃어주고 오면 된다. 운이 좋으면 딸 수도 있다. 근래 들어 블랙잭의 승률이 한창 높은 편이다.

“생각 머리가 그것밖에 없으니 그 모양 그 꼴이지, 애한테 할 이야기가 없어서 전쟁 나기 전에 미국으로 건너오라는 소리나 해대고.”이 여자는 벌써 언제 적 이야기를 꺼내서 우려먹는다. 자식 이야기 꺼내면서 긁는 대는 정말 참기가 힘들다. 조나단은 그래도 참기로 했다.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 했다.

“생각하는 게 완전 유치한 거는, 야! 그런 생각은 초등학교 애들도 안 하겠다!”잠자코 있는 게 불만인지 오순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지만 조나단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렇게 애국심 들먹여가며 비아냥대는 여자가 딸한테는 전화해서 통장에 있는 돈부터 다 미국으로 부치라고 지랄을 해 쌓냐? 조나단은 작년 이맘때 딸에게서 엄마가 서운하다는 전화를 받았다. 서로 말은 안 하기로 했지만, 오순 이야말로 정말 상종 못 할 여자라고 생각했다.

“남 잘되는 꼴은 못 보고, 저만 살겠다는 심보는 완전, 벌레야.”“뭐? 벌레?”조나단의 눈에 쌍심지가 돋았다. 별의별 욕을 다 먹고 살았지만 이건 또 처음이다. 아무래도 오늘 그냥 넘어가긴 그른 것 같다.

“야, 이 씹당나구야! 너 이 썅년 아가리 닥치지 못해!”“허구, 무서워 죽겠네. 왜 벌레라는 소리 들으니까 가슴이 뜨끔하냐?”동네 여자가 한 명 들어오더니 오순과 조나단 사이에 감도는 전운을 간파하고 슬슬 눈치를 본다. 주변에는 이미 호전적 기질의 부부로 정평이 났으므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장사하는 처지에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조나단은 여자가 가지고 온 시리얼과 우유를 계산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어쨌거나 다시 한 번 참기로 했다.

“그래. 내가 벌레면 너는 구더기야. 벌레는 물면 아프기라도 하지. 너는 남의 상처에서 몰래 꿈틀거리면서 병균 옮기는 구더기야.”뒤쪽에서 겉옷을 내려 입으며 조나단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구둣주걱으로 신발을 꿰고 자물쇠를 챙기며 문 닫을 준비를 하는 동안, 이제는 스스로가 활인(活人)의 경지에까지 올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낌새가 이상했다. 조나단이 돌아보았다.

“?….”과자 봉지를 손에 쥔 채 바들바들 떨기까지 하는 오순의 눈에서는 시퍼런 광선이 쏟아져 나왔다. 조나단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래! 이 좆같은 새끼야! 네가 다 해!”조나단은 날아온 과자봉지를 피하지 못하고 얼굴에 정통으로 맞았다. 팔을 걷어붙이고 밖으로 나서려는데 오순이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델리 진열창 앞에 주저앉아 바닥까지 쳐 대는데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장모 돌아가셨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이 났을 뿐이다.

평생 손가락이 휘어지라 일하고는 결국 구더기 소리나 듣는다, 제 입성 치레나 해 댈 줄 알았지 병신같이 허리건 다리건 힘도 쓰지 못하는 인간 때문에 몸이 다 망가지도록 일만 한 게 억울하다는 둥, 사람이 들어오건 말건 그칠 줄을 몰랐다. 조나단은 마치 남의 일처럼 계산대 주변을 두런거리며 얼굴 홧홧한 소리를 끝까지 들어야 했다. 10분을 그러고 앉아 신세 한탄을 하며 울부짖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섬뜩 무서운 생각에 델리로 올라갔더니 오순의 가방이 없다. 창고 뒤편 주차장에서 차 내빼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맞아도 대들다가 도망가거나 하지 울고불고하며 한탄하는 부류의 여자가 절대 아니었다. 조나단은 잠시 골몰했다. 그러나 벌레 소리를 먼저 한 건 오순이였다. 벌레에 비해서 구더기가 그리 심한 욕이었던가? 얼른 수긍할 수 없었다. 그 악다구니가 오늘따라 왜 그런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불쌍한 인간이란 생각도 들었다.

평생 호강다운 호강 한 번 시켜주지 못한 것도 마음에 걸렸다. 자신이 암 수술받기 전에는 울면서 모든 걸 용서해 달라고도 했던 여자다. 그나마 이렇게 가게라도 하나 하는 건 오순이 아니었으면 못 할 일이다. 사실, 매출의 삼분지 이는 맛있다고 소문난 오순의 썹(sub)이며 샌드위치에서 나오지 않는가 말이다. 알듯 모를 섭섭함에 조나단은 담배를 물고 차에 올랐다.

카지노만 생각하면 어릴 적 짝사랑하던 여인이 먼발치서 다가오듯 진작부터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두 갈래 방향에서 조나단은 얼른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조수석 수납함에서 쎈트룸 영양제 통을 꺼내 천천히 흔들어 보았다. 빈 통에서 알약 두 개가 딸그락거렸다. 날은 눈에 뜨이게 길어졌다. 붉은 노을이 야트막한 건물들의 공제선 너머에서 어슬렁거렸고, 하나둘씩 켜지고 있는 가로등 아래 나무가 웃고 있었다. 이제 꽃이 피고 잎사귀가 나오면 팔랑팔랑 손짓하며 인사할 것이다.

“벌레가 뭐가 나빠! 구더기가 뭐 어때서! 그것들도 다 살 이유가 있으니까 사는 거지. 꼬물꼬물 거리고 살다가 뒈지는 거, 다 일맥상통이라고. 그렇지! 일맥상통! 가만? 구더기가 커서 벌레 되는 거 아닌가?…. 그러엄!!”조나단은 핸들을 돌려 골목을 빠져나갔다.

- 끝 -
<당선소감>

할렘가의 삐거덕거리는 작은 골방, 한쪽에 서 있는 자전거. 가끔은 나도 아주 씩씩했다. 무위의 시간임을 모른척하고 살 때는 그렇다. 조금 더 씩씩해지고 조금 더 모른 척, 해야겠다.

한국일보와 두 분 심사위원께 인사드린다. 나보다 더 기뻐해 준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김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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