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9일 쿠바 수도 아바나 도심 골목의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 .
헤밍웨이의 단골 술집으로 알려진이 곳 입구에서는 검은 베레모에 시가를 꼬나 문 구릿빛 사나이가 다짜고짜 이방인을 자신의 아바타로 분장시킨다.
둘 다 영락없는 체게바라다. 그리고는 길 한 가운데 버티고 서서 골목대장 흉내를 낸다. 카메라 셔터는 어김없이 찰칵거렸고, 이방인은 이 정체불명의 사나이에게 팁 한 푼 건네야 했다.
체게바라와 헤밍웨이가 개방 물결에 올라 탄 쿠바를 먹여 살리고 있었다. 정작 쿠바의 살아 있는 영웅인 카스트로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아르헨티나 의학도인 체게바라와 미국 소설가 헤밍웨이가 쿠바 관광산업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쿠바 혁명 성공 후 고관대작을 팽개치고 볼리비아 혁명에 뛰어들었다 주검으로 돌아온 체게바라는 전 세계 혁명의 아이콘이 됐고, 쿠바에 28년 동안 살았던 헤밍웨이는 카스트로가 좋아한 유일한 미국인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헤밍웨이가 모히토를 즐겨 마셨던라 보데기타를 뒤로 하고 분홍빛 외벽의 암보스 문도스 호텔로 발길을 돌렸다. 이 호텔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511호실에서 그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집필했다. 이 방에는 헤밍웨이가 카스트로와 같이 찍은 사진, 낚싯대, 저서 등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511호 전담 해설사인에 스페란사(50ㆍ여)씨는 “1960년 5월 15일 낚시대회에서 헤밍웨이와 카스트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 우정을 나눴다”며 “카스트로에게는 지금도 헤밍웨이를 빼고는 미국인 친구가 없다”고 말했다.
헤밍웨이가 아바나에 정착한 곳은 카리브해 인근 핑키비히아의 전원주택이었다.
지금은 헤밍웨이박물관으로 변신한 이 곳에도 관광버스가 끊이지 않았고, 여행객들은 박물관 정문에 내걸린 종을 그냥 지나치지않았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출신의 크리스탈(64ㆍ여)씨도이 종을 쳐보며 “쿠바로 오기 직전에 ‘노인과 바다’를 읽었다. 소설의 주무대를 둘러보니 여간 흥분되는 것이 아니다”며 들뜬 표정이었다.
그랬다. ‘노인과 바다’는 바로 이곳에서 탄생했다. 이 곳에서 차로 10분 거리의 바닷가 마을 코히마르가주 무대다. 이 카리브해에서 소설의 주인공인 노인 그레고리오는 104살까지 장수했다. 미국과 국교 단절로 쿠바에서 추방된 헤밍웨이는 1961년 미국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그레고리오는 2002년 숨지는 그 날까지 소설 주인공이라는 유명세를 누렸다.
이 마을 테라사라는 바닷가 식당모퉁이 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못했다. 테이블도, 의자도, 수저도 다 있는데 착석 금지다. 헤밍웨이가 즐겨 앉았던 자리기 때문에 영구 결석 조치했다고 한다.
뜻밖에 이 식당에서 한국인 배낭여행객을 만났다. 쿠바에 3일있는 동안 눈 씻고 찾아봐도 우리나라 사람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 곳에서 30대의 여회사원 두명과 마주친 것이다. 5년 전 혼자 세계일주를 하던 중 쿠바에 들렸다는 김지영(38)씨는 “쿠바에 미국 국기를 그린 옷이 팔리고, 택시에도 두 나라 국기가 내걸린 것을 보니 5년 전과는 세상이많이 달라진 것 같다”고 말했고, 지영씨에게 등 떠밀려 왔다는 이진선(34)씨는 “도시가 다채롭고 사람들이 친절한 것이 마음에 든다”며 쿠바 예찬이 끝이 없다. 이 배낭여행객은 우리말을 하는 쿠바인 가이드 에벨리오가 신기한 지 얘기도 나누고 사진도 찍으며 추억을 담아갔다.
쿠바 혁명의 영웅인 체게바라의 흔적은 아바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체게바라하면 항상 떠오르는 사진 한 장이 있다. 이현장을 찾아 아바나 혁명광장으로 달렸다. 7만2,000㎡ 규모의 이 광장한 켠에 쿠바 독립의 아버지 호세 마르티의 동상과 기념비가 우뚝 서 있었다. 109m 높이의 이 탑을 보고 북한이 주체탑을 지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광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내무성 건물에 바로 사진에 등장하는 체게바라의 얼굴이 선명했다. 아래에는 ‘Hasta la Victoria Siempre’ (영원한 승리의 그 날까지)라는 글이 선동적이다. 쿠바 혁명과는 전혀 함수관계가 없는 내 피가 달아오른다.
아르마스 광장의 책가게에도, 길거리 담벼락 그림에도, 티셔츠에도, 모자에도, 기념품에도 체게바라가 빠지지 않았다. 사실 체게바라의 도시는 산타클라라다. 그의 유해는 혁명 중볼리비아에서 총살당한 지 30년 후인 1997년 발견돼 그해 산타클라라 기념관으로 옮겨왔다. 반드시 다시찾아볼 도시 리스트에 산타클라라를 올렸다.
혁명광장 한 켠은 1950년대 풍의 클래식카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30달러를 내면 30분간 클래식카 뒷자리에 앉아 아바나 도심을 누빌 수있다며 호객행위가 한창이다. 쿠바혁명 전 아바나를 누비던 클래식카들은 이제 아바나의 명물이 됐다.
쿠바의 변화는 이미 예고 돼 있다.
지난해 7월 미국과 쿠바가 정식 수교한데 이어 올 3월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으로는 88년 만에 쿠바를 방문했다. 그리고는 영국 출신 록밴드 롤링스톤스와 명품 브랜드 샤넬의 아바나 공연, 미국 크루즈 쿠바 입항, 미국영화 진출, 미국-쿠바 직항 추진 등개방 움직임이 가시화하고 있다.
마지막 관문은 미국의 금수조치해제 여부다. 공화당이 우세한 미 의회가 아직 금수조치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가운데 쿠바도 미국 측이 매년 4,085달러(480만원)의 임대료만 지불하고 있는 관타나모 해군기지 철수를 주장하며 맞불을 놓고 있다.
하지만 개방이 대세인 것은 아바나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에서부터 증명됐다. 쿠바는 외국인에게 별도 비자를 발급하고 출입국 시 희망자에게는 도장도 비자에 찍어 준다. 미국과 쿠바가 정식 수교하기 전만 해도 여권에 쿠바 도장이 찍혀있으면 미국행에 빨간불이 켜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권에 붉은 색 쿠바 출입국 도장이 몇 개가 찍히든 체게바라 티셔츠를 입고 가든 딴지 거는 양키들이 사라졌으니 국제관계란 참 요지경이다.
전준호 기자 jhjun@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