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마치 기차여행이라도 하듯 즐겁고 행복하다. 칙칙폭폭… 기차는 달리고, 창가로 스쳐가는 아름다운 정경은 마치 하모니의 그것처럼 영혼의 향수… 고향으로 마구 달려가게 하곤한다.
그러나 오케스트라를 듣는 우리들과는 달리, 관현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는 좋은 지휘자를 만나지 못하면 좋은 여행은커녕 불협화음만 내다가 종착역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도중하차를 해야하는 경우가 많다.
길을 알고, 방향을 선도해 나갈 줄 아는 지휘자란 기차가 왜 멈추는지, 오케스트라가 왜 불협화음을 내는지를 꿰뚫고 있는 지휘자를 말한다. 병든 오케스트라란 좋은 지휘자가 없는 오케스트라를 말하며, 상처부위를 알고도 도려낼 줄 모르는 오케스트라를 말한다.
수년 전 도이치 그라마폰이 뽑은 세계 20대 오케스트라 중 (베이지역의)샌프란시스코 심포니가 12위를 차지한 적이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의 오케스트라 중에서 20위 안에 든 것도 대단한 일이라 생각하며 그 이유를 찾아봤다.
전통과 역사를 따지자면 유럽이나 미 동부의 오케스트라들에 한참 뒤지는 서부의 촌동네 샌프란시스코가 어떻게 12위를 차지했을까?
이유는 바로 지휘자 마이클 틸슨 토마스 때문이었다. M.T.T는 1995년부터 샌프란시스코 심포니를 지휘해 오면서 점진적인 메스로 오케스트라를 개혁, 3차례나 그래미 상을 수상했고 활발한 현대음악의 발표, 야심찬 기획프로그램 등으로 지역사회의 호응을 얻어낸 것이 크게 인정받았다.
명 지휘자 없는 명 오케스트라란 존재하지 않는다. 번스타인 없는 뉴욕 필, 카라얀 없는 베를린 필 등이 21세기 들어 추락한 예는 지휘자의 역량을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세계의 오케스트라계는 그러므로 얼마나 유능한 지휘자를 모셔오느냐의 전쟁터나 다름없다.
어느 정도 이름이 오르면 모셔가기 바쁘지만 일단 2류로 분류된 지휘자는 어디를 가도 쪽박이다.한국의 서울시향은 정명훈이라는 세계적인 지휘자를 모신 덕분에 지난 10여년간 장족의 발전을 거듭, 동양권에서는 NHK교향악단도 따내지 못한 도이치 그라마폰과의 전속 계약까지 따냈다.
다른 말로 동양의 일급 오케스트라로 거듭난 것인데, 20여년 전만해도 KBS 교향악단 등에 밀려 2류 교향악단으로 분류되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라 아니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그런 정명훈 지휘자가 지난 연말 일련의 정치적인 회오리에 휩쓸려 10여년간 쌓아올린 서울시향을 뒤로하고 쓸쓸히 퇴장했다. 정명훈을 사랑하는 음악팬들과 한국의 음악계로서는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닌, 불행한 사건이었고 정명훈같은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문화적 풍토(정치적 풍토라해야할까)에 아쉬움을 남긴 것도 사실이었다.
지휘자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꾸며보고 싶다는 꿈일 것이다. 유럽에서 활동하던 정명훈이라해도 다를 바 없는 것이었는데, 이때(2006년) 서울 시장이었던 이명박씨의 러브콜이 왔다. 1998년 KBS 교향악단에서의 실패,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에서의 퇴출사건 등으로 지휘자에게 정치적인 뒷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었던 정명훈은 한국으로의 U턴을 결심했고 이명박 시장의 대통령 당선과 더불어 본격적인 정명훈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달마는 왜 동쪽으로 간 것이었을까? 그것이 정치적이었건 아니면 이상을 펼치기 위해서였건 정명훈은 곧(정권이 바뀜과 더불어) 각종 특혜 유혹 등으로 언론에 까발려지기 시작했고 이를 정면으로 반박할 변명을 내놓지 못하면서 그의 운명은 어느정도 예견되기 시작했다.
동쪽으로 간 정명훈이 이제 또 다시 서쪽에서 시작해야 된다는 것은 불행이며 또 어디까지나 정명훈의 문제겠지만, 정명훈이 정치적인 희생양으로만 비쳐지는 것 또한 과도한 비약일지 모르겠다.
오히려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정명훈을 만난 것이 한국의 음악팬들로서는 불행이라면 불행이었다. 아무튼, 굿 바이 마에스트로… 이제 정명훈이 (서울시향에서)남긴 음악적 자산을 잘 보전해야하는 것이(한국에 남은)정치인들의 몫(?)이라는 것은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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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