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나무 가지가 휘어지듯 뻗어 올라간다. 하늘 끝에 닿으려는 듯, 가느다란 떨림이 느껴지는 가지의 끝은 어두운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가리킨다. 달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지러짐이 없는 모습으로 보아 보름달일 것 같다. 까맣게 내려 앉은 어둠 속에 하얀 달빛이 쏟아지며 만개한 매화꽃이 빛난다. 바람 한 점 없는 싸늘한 공기를 뚫고 진한 꽃향기가 퍼진다. 매서운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밤, 꽃망울을 터트리는 매화의 의지가 반짝인다.
매화는 잎보다 꽃이 먼저 피기 시작한다. 빠르면 1월 하순부터 개화를 시작해서 봄을 알린다. 때문에 예로부터 꽃이 일찍 핀다는 ‘조매(早梅)’, 추운 겨울에 핀다는 ‘동매(冬梅)’, 눈 속에 핀다는 ‘설중매(雪中梅)’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눈과 서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언 땅에 꽃을 피워 맑은 향기를 뿜어내는 매화의 모습은 수많은 시인묵객의 사랑을 받았다. 매화가 난(蘭), 국(菊), 죽(竹)과 더불어 사군자(四君子)로 손꼽히거나, 소나무[松], 대나무[竹]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로 불리웠다는 사실은 옛 선조들의 매화 사랑을 단편적으로 엿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힘겨운 시련을 뚫고 피어나는 희망을 상징하는 매화는 일제 치하를 겪으며 한층 더 특별해졌다. 어두운 시대상을 배경으로 새로운 광명을 염원하는 의지를 담아냈기 때문이다. 이른 매화가 깨어날 준비를 하는 때, 만개한 백매(白梅)가 가득한 화폭을 마주하며 독립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던 시인의 시 한 편을 떠올린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17회나 투옥되고, 끝내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했던 이육사(李陸史, 1904-1944)의 유고시이다.
불혹(不惑)을 갓 넘긴 시인은 매화를 떠올리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고 눈을 감았다.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이 해방을 맞기 1년 전, 1944년 1월 16일이었다.
광 야 (曠野)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미지 정보>
Unidentified Artist Plum Blossoms
Korea, 20th century
Hanging scroll; ink on paper
Purchase, 2001 (9497.1)
작자미상
매화도
대한민국, 20세기
종이에 수묵
2001년 구입 (9497.1)
오 가 영
호놀룰루미술관 아시아부 한국미술 담당
한국국제교류재단 파견 객원 큐레이터
<고송문화재단 후원>
<
오가영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