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인을 끝까지 사랑한 가족 (박석규 / 은퇴 목사)

2015-09-2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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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기준 미국 내 한인 인구가 220만이라는 보도를 보니 아펜젤러 선교사 생각이 난다. 헨리 아펜젤러는 한국에 온 개신교 첫 선교사다.

1885년 4월5일, 27세의 젊은 나이에 갓 결혼한 아내 엘라 갓지와 함께 기다리거나 환영하는 사람 하나 없는 낮선 땅 조선을 찾아 왔다.

교육과 문화 의료 사업만 허락 받아 신앙 월간지를 발행하고 문화 사업에 힘썼다. 기독교서회와 YMCA를 창설하고 배재학당을 세워 신교육을 시작했으며 정동 감리교회를 개척했다. 효율적인 전도를 위해선 한국어 성서번역이 최우선 과제라고 인식하여 성서번역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1902년 6월11일 전남 목포에서 열린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차 인천을 떠나 목포로 향하던 중, 어청도 해역에서 배가 일본 상선과 충돌하여 44세의 젊은 나이에 안타깝게 순직했다. 한국에 온지 17년이 되는 해이며, 선교의 터를 닦아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려던 때였다.

그는 수영에 능했고 1등석에 승선하여 구조될 수 있었지만, 동행하던 조수 조한규 씨와 방학을 맞아 귀향 중이던 정신여중 학생을 구하기 위해 애를 쓰다 배와 함께 침몰하며 별세 했다. 그의 시신은 양화진 외국인 공원묘지에 잠들어 있다.

그런데 아펜젤러 선교사가 한국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던 그 해가 1902년이다. 바로 그 1902년 연말에 그가 세운 인천 내리감리교회 교인을 주축으로 하여 102명이 미국 하와이를 향해 이민을 떠난다. 아펜젤러 선교사가 살아있었더라면 얼마나 감격스러워 하면서 교인들을 미국으로 보내 주었을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아펜젤러, 그는 한 알의 밀알처럼 많은 열매를 남기고 죽어갔다. 이민 111주년이 되는 2014년 미주 한인 인구가 220만이라니 실로 엄청나다.

그의 묘지를 방문하면 감동스러운 사실이 있다. 아펜젤러 선교사 묘지 곁에 두개의 무덤이 더 있다. 아들 헨리 덧지 선교사와 딸 엘리스 레베카 선교사의 묘다.

아들 헨리 덧지 아펜젤러는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1917년 한국에 선교사로 온다. 아버지가 세운 배재학당을 맡아 20여년 교장으로 학교를 크게 발전시키며 일하던 중 1952년 백혈병으로 뉴욕의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 중 64세에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을 남겼다. “내가 태어나고 아버지가 선교하다 묻힌 한국에 나를 묻어 달라.”

그리고 외동딸 엘리스 레베카 역시 미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1915년 선교사로 내한했다. 이화학당 학장,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하는 동안 이화여자대학을 세계적인 대학이 되도록 기반을 다져 놓고 64세에 뇌일혈로 별세했다. 그녀 역시 아버지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아버지 아펜젤러 선교사 곁에 잠들어 있다. 한국인을 끝까지 사랑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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