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림이 있는 산문] 최정 ㅣ 스튜디오를 누리며 살던 그 세월에

2015-09-24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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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 스튜디오를 갖고 있었을 때 제일 좋았던 건 그 시간이었다. 열쇠로 찰칵, 문을 열고 들어서며 전기 스윗치를 올리고, 방을 가로질러 창가로 가서, 음악을 틀어놓고, 커피를 내리고, 의자에 앉아 얼마간 아무 생각없이 고즈넉하게 앉아 있던 시간. 참으로 사치스럽고 참으로 소박하며 나태 한듯 깨어있던 그 시간.

그 귀한 세월을 접고 집으로 들어 오니 몸은 편안하다 못해 처지고 집안 곳곳에는 끝맺음 하지 못한 일들이 사방에 널려있는듯, 마음이 소요스럽다. 널려있는 게 시간인데 왜 음악에 굶주린듯 느껴질까? 그곳에 있을 때도 일부러 이 시간에는 오직 음악만을 듣겠노라, 하고 퍼질러 앉아 음악을 듣던 시간은 없었는데..

매일의 일상에서 하도 음악이 그리워 보기 시작한 게 유투브이다. 기계가 싫어서 사진을 찍고 싶은 풍경과 접했을 때조차 남편보고 저기를 이러 저러하게 잡아 찍어 달라고 입으로 부탁해서 찍고, 대체 어느 누가 컴퓨터를 발명해 놔서 이리 속을 썩이냐고 툴툴 댔는데, 이것 저것 맘껏 골라 잡아 입맛대로 들을 수 있는, 방대한 도서관 같고 끝없는 오솔길 같은 유투브를 발견하고는 끝없이 내달리는 현대의 기술이 용서가 됐다.


아니, 용서가 아니라 고마웠다. 참 이상도 하지.. 바라는 뭔가가 주어지고 나면 꼭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무언가가 또 주어진다. 무라까미 하루끼는 잘나가는 작가다. 나는 그의 소설을 여러권 읽었다. 왜 이 사람이 그렇게 유명하지? 남들이 모두 아는, 나만 모르는 무슨 숨은 마력이 있나 싶어 열심히 탐색하듯 읽었다.

결국 그의 소설은 내 취향이 아니다, 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뭔지 정말 진짜인, 대단히 귀한 걸 찾아 헤메는 것 같기는 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마치 순정한 청년이 무슨 통과의식을 치루는 듯 젊은 여자와 관계하는 구조를 그리며 이건 음란이 아냐, 속된 것들이나 그렇게 생각하지 이건 구도의 한 방편이야, 하고 애써 우기는 것 같은 장면이 여러 번 나와 그게 게름직하고 싫었다.

그런데 예민한 감성 때문에 내가 이야기를 나누기 좋아하는 지인이 자신도 하루끼 소설은 안좋아했는데 산문을 보니 좋더라고 꼭 한번 보라고 추천을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또 다른 친구가 우연처럼, 필연처럼, ‘하루끼가 오자와 세이지와 음악을 이야기하다.’라는 책을 가져다 주었다.

자신이 관심있는 주제에 대하여 많은 지식이 있는 분들이 담소를 나누는 자리에 옆에 슬쩍 끼어 앉아 엿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단 한마디 끼어들 계제가 아니었다 해도 그저 옆에서 듣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 나는 마치 하루끼와 오자와가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는 테이블 구석에서 투명인간이 되어 그 자리를 누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루끼의 음악에 대한 감수성은 대단했다. 그 책을 읽으며 베토벤과 브람스에 취해 헤메다 우치다 미쯔코를 듣게 됐다. 그녀의 CD를 몇 장 갖고 있어 종종 듣기는 했지만 녹화된 그녀의 연주를 본것은 처음이다.

2013년에 런던에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한 것을 보며 나는 거의 울고 싶었다. 숨이 쉬어 지지 않았다. 피아노를 품에 안듯, 얼르듯, 깨질까봐 바들바들 떨며 보듬듯, 한 음 한음 누를 때마다 입이 벌어지고 눈이 감기고 혼이 나간듯한 표정을 보며 정말 무어라 표현 할 수 없는 뭉클한 감동이 밀려왔다.

그건 세련되 보인다더나 노련해 보인다거나 자신감이 있다거나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연주를 하는 동안 그녀에겐 근사하게 느껴지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조차도 없어 보였다.

그녀에겐 오직 그 순간 자신이 내는 소리인줄도 의식하지 못하면서 처내는 음, 그 음만이 존재 하고 있었다. 극심한 고통같기도 하고 극심한 희열같기도 한, 숨이 막히는 그 표정… 삶은 황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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