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림이 있는 산문] 최정 ㅣ 나는 내가 글을 잘 쓰는 줄 알았다

2015-08-27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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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글을 엄청 잘 쓰는줄 알았다. 초등학교때 국군 아저씨께 위문편지를 쓰면 꼭 내게는답장이 왔다.

그때는 징그럽게 늙은 아저씨라고 생각되서 편지 쓰고픈 맘은전혀 없었지만 선생님이 단체로써야한다 해서 할수없이 썼건만이제 생각하니 그 국군 아저씨는솜털 보숭보숭한 어린 소년이었을 터이니 어쩌면 소년의 감성에닿는 부분이 있었던 건지. 중학교때 E대의 메이퀸 이라는, 아주 빼어나게 예쁜 교생선생님이 왔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 몸부림치는 나이여서 우리 모두는 단체로 사랑에 빠졌다. 그 예쁜 교생이 떠난 후 많은 애들이 사랑의편지를 썼건만 답장을 받은 사람은 나 하나였다.


훗날, 남의 연애편지를 대신 써주기도 하고 또 한번은 군대 간 친구가 제발 편지해달라고 간청해서 편지를 썼더니 그 편지를 검사하는 이가 자기에게도 편지 좀 써줄수 없느냐며 간곡하게 부탁하는 군사우편을 받기도 했다.

학보에 글이 실리기도 하며 이래저래 난 내가 글을 꽤 잘 쓰는 줄 알았다. 잘 쓴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라 할지라도하여간 글에 대한 짝사랑은 있어서 신문사에 애처롭게 매달려 지면 한귀퉁이를 얻고 쓴 세월이 어언 삼십년이다.

단조로운 일과에 좁은 생활반경에서 무슨 새로운 소재가 있을소냐. 그저 별 볼일 없는 내 사는얘기일 수 밖에. 쓰고 싶어 쓰면서도 어떤 때는 내 글을 다시 읽다 챙피해 죽을 것 같기도 하다.

주절주절 신문지상에 속사정을털어 놓으면 종종 대로에서 두 손두 발 다내던진채 널부러진 기분이다.

그런데도 어쩌자고 죽자고 붙잡고 앉아 쓰게하는 내 속의 존재는 뭘까? 어떤 때는 마치 두개의 내가 있어 서로 다투는 것 같다.

야, 나대지 말고 가만있어. 먼지털고 걸레질 하고 부엌일 하고뒷마당 나가 잡초 뽑고.. 할일이태산이구먼, 하는 나. 한편으론 행여 복용 즉시 글 잘 쓰게 되는 신약은 개발되지 않았나, 자고 났더니 웬 마술에 걸려 줄줄 써내는것마다 무릎을 치게하는 명문장가가 되는 일은 없나, 두리번거리는 나.

얼마 전 무슨 문학상이라는 걸타게 되어 신나 했는데 그 상이란걸 타고 나서 찬찬히 내 글을 돌아보니 상탄 건 정말 기분좋은 일이로되 참 이렇게 죄송스러울 수야…, 하는 기분이다.


밤낮 몸 아프다고 징징대고 성질머리는 더러운데 딴에는 글에 대해서는 하면한 번 물으면 놓지 않는 진돗개처럼 물고 늘어지는 그 정성이 갸륵해서 앞으로 개과천선하라고 주신 걸까?

잘 쓰고 못쓰고는 제쳐놓고 아무튼 원고를 보내야 하는시간은 다가오는데 못난이 내 글은 챙피하다고 문닫아 걸고 꽁꽁숨어서는 아무리 달래도 나와주지 않는다. 행여 어디 컨닝할 구석이라도 있을까 하고 장영희의 수필집을 뒤적이니 ‘꿈’이라 제목이붙은 글에서 이런 구절을 나온다.

‘꼭 사흘만, 아니 꼭 이틀만, 아니 꼭 하루만이라도 학교에 가지않고 아무도 내게 전화하지 않고,아무 약속이나 회의도 없고, 읽고고쳐 줘야 할 학생들 페이퍼도 없고, 마감일 다가오는 원고도 없고,이렇게 그냥 앉아 있을 수 있다면…’허어 참! 어제도 그제도 그그제도,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전화도 없고 가야할 곳도 없고 누구붙잡고 가르칠 일도 없고.. 사회적약속이라고 되어 있는 건 오로지이 원고 하나 쓰는 일 밖에 없는내 팔자의 한 모습을 이렇게 간절하게 ‘꿈’이라 부르며 오매불망바라는, 기막히게 글 잘 쓰는 인생도 있는 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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