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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의 초대/ 민대기 상법전문 변호사

2015-08-1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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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계사에 변호사까지...일.공부 욕심 좀 부렸죠”

차 한잔의 초대/ 민대기 상법전문 변호사

<사진 천지훈 기자>

어릴적부터 영어에 매력느껴 동네 미군부대 가 회화 실습
컬럼비아대학원 등록금 선뜻 빌려준 은인 잊지못해

미동부지역 한인처음으로 세법을 공부한 회계사 출신 상법 변호사 민대기, 그가 있음으로 인해 뉴욕한인들의 미국살이가 한결 쉬워졌다. 그의 이민사를 들어본다.

▲일복 많은 사람
그는 새벽 5시 반부터 움직인다. 아침 5시에 문을 여는 집 근처 짐에서 한시간동안 운동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와 아침식사, 오전 8시경 1층 사무실로 출근한다. 2010년에는 28년간 문을 열었던 맨하탄 32가 사무실을 정리하고 기존의 뉴저지 잉글우드 클립스 사무실 하나로 통일했다.


한미상공회의소, 경제인협회, 수산인협회, 청과협회 등 굵직굵직한 한인단체의 자문 변호사에 대우, 효성, 현대, 한국계 상업은행(현 우리아메리카 은행) 등의 미국 진출을 도와온 그는 지금도 한인들의 상업용 부동산 거래를 돕고 28년째 한국타이어, LG 및 전자회사 고문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처음 그는 회계사였다.71년 도미하여 73년 컬럼비아 경영대학원 MBA 과정을 마친 후 시티뱅크에 취업하여 서울지사로 나갔다. 외국계 한국지점이 4곳뿐이던 시절 특전사령부, 대학조교, 검사인 고등학교 친구들 월급보다 거의 20배 가까이 받고 모든 것이 갖춰진 한국생활을 1년 반만에 접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커리어가 중요했다. CPA 회사에 들어가 회계감사 일을 해보니 처음에는 재미가 있었지만 2년반후 내 적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 더 즐거운 일을 찾자 싶었다. 그래서 맨하탄 직장을 다니며 밤에는 포댐 로스쿨을 80년부터 4년간 다녔다. 난 평생 일복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4년간 PWC M&A 그룹에서 일하면서 시카고 소재 미국최고의 부동산 회사 프로젝트를 두달간 맡았다. 아침 6시 비행기로 보스턴에 도착, 로간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 아침을 먹고 일한 다음 오후 4시면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 도착, 다시 택시를 타고 포담법대로 가서 2시간이상 강의를 들었다. 수업 후 라커펠러 센터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논의된 안건을 처리하고 다음날 행사를 지시한 다음 퀸즈로 가서 저녁식사를 했다. 주말에는 로스쿨 공부에 매달려야 했고, 두달동안 그렇게 살았더니 몸무게가 확 줄었다.”

동양인 처음으로 쿠퍼스 라이브랜드(PWC) 매니저를 했고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12명의 팀원 백인들의 기를 일로써 꺾었다. 태도가 불손한 사람일수록 계속 일을 주어 잘못 해 온 것을 고쳐주고 공정하게 처리해주다보니 나중엔 ‘팀장은 DK MIN’ 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30대에 일하느라고 밤을 가장 많이 샌 사람 나오라고 하면 최우선 랭킹에 들었을 것이다. 주중에는 3~4시간 자고 주말에만 7시간 정도 잤다. 밤을 새운 그 다음날 오히려 정신이 맑았다.”

그렇게 변호사가 되었다. 당시 한인변호사로는 송상문, 이동호 등 5명 정도. 최초 한인 세금전문 회계사 경험은 법률적 면에서도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영어가 참 아름답구나”
민대기는 1945년 대전 유성에서 태어났다. 2남2녀의 막내로 자란 그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동네에 라디오가 있는 집으로 매일 오후 5시 AFKN 영어 뉴스를 들으러 다녔다.

“영어 한마디 모르면서 뉴스를 듣는데 샌프란시스코 라는 지명이 나왔다, 미국에 있는 도시 이름이란 것은 알았다. 모나코, 도쿄, 서울 하는 지명만 알아들어도 어찌나 좋은지. 중학교에 들어가 A, B, C, D를 배우는데 영어가 참 아름답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당시 대전중고 바로 옆에 미군 통신부대가 있었고 그 사이에 2중철망이 가로막혀있었다. 중학시절, 회화를 실습하러 점심때면 그곳으로 가서 미군들에게 말을 붙였다. 백인들은 대답을 잘 안해주나 흑인들은 곧잘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학교 친구들이 빙 둘러서서 구경을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1학년때 학교영어웅변대회가 열리자 그는 영어원고를 써서 당시 대전 KBS 영어회화 방송을 하던 대전침례신학교수를 찾아가 도움을 받았다. 이분이 전 상록회 총무 주승욱씨다.

학생 1,500명이 모인 야외 농구장 무대에서 미군 소위와 중위 등 미군 4명이 심사위원인 가운데 1학년생이 고학년 선배를 제치고 당당히 일등을 먹었다. 그후 대전 KBS방송에 주교수와 영어수업을 함께 진행하면서 민대기는 충남일대 학생 스타가 되었다.

“원래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때는 교사들이 옛날얘기를 해주는 시간이 있었다. 교사의 시간 후에는 학생들이 나와서 이야기보따리를 끌렀다. 중학교 1학년때 로빈슨 크루스를 읽은다음 다른 이야기 100개 이상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매사 호기심 강하고 열심히 하던 민대기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시절, 시청 앞 문화공보원이 주최하는 영어회화클럽 USIC에 나간다. 여기서 그는 일본을 40일간 여행하며 리더십과 영어를 배우는 국제학생회의 참여 기회도 가졌다.

▲한 사람 몫은 했다
1976~1981년 딜로이트 앤드 해스킨스 셀스, 1981~1982년 아더 영 코, 1985년 쿠퍼스 라이브랜드 등에서 일한 그는 변호사가 되면서 한인사회 봉사도 잊지 않았다.

1994년 뉴욕한인변호사협회 9대 회장으로 2년간 봉사하며 플러싱 하이스쿨 강당에서 무료법률상담을 했고 후배 변호사들에게 한인사회 참여를 적극 권유했다. 10년이상 뉴욕한인회 이사, 2005년부터 10년이상 뉴욕평통자문위원, 한인들을 위한 사업 세미나도 열었다. 뉴저지 잉글우드 클리스에 살면서 22년동안 플래닝 보드 멤버로도 활동했다.

함께 놀고 공부하던 친구들이 국회의장, 시장, 대검중수부장, 비서실장을 했거나 현역인데 한국생활에 미련 없느냐는 질문에 “일찌감치 나는 한국에서 대성할 사람이 아니다고 판단했다. 첫째는 술을 못 마시니 술문화가 일반화된 한국과 안어울린다. 또 강직한 성격까지 더하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는 그는 “뉴욕한인의 한 사람으로 한사람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답한다.

한사람 아닌 열사람이상의 몫을 해온 그의 겸손함이다. 그는 평생 잊지못할 일이 있다고 한다. “직항이 없던 때라 동경, 미네아폴리스, 시카고를 거쳐 뉴욕에 오는데 17시간 걸렸다. 뉴욕에 왔지만 걱정으로 잠을 못잤다. 컬럼비아는 세계의 인재들이 모이는 곳인데 낙제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고, 무엇보다 당장 입학금이 없었다. 수중엔 200달러뿐이었다.”

71년 입학허가를 받고 어떻게 되겠지 하고 미국에 왔지만 방법이 없어 컬럼비아 대학내 계단에 우두커니 서있던 이틀째, 키가 자그마한 한 사람이 다가오더니 한국인이냐, 반갑다며 말을 시켰다. 한국계 방직회사 주재원인 그는 퀸즈 아파트에 텔렉스를 하나 놓고 한국 옷감을 팔려고 뉴욕에 왔는데 영어가 부족해 랭귀지 스쿨에 등록하러 온 것이다.

미국에 공부하러 왔는데 입학금이 없다는 말을 들은 그는 “굉장히 무모한데 기상이 좋다. 학생 등록금을 먼저 줄테니 내년 여름방학에 꼭 갚는다고 약속하라”고 했다.
공금인데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냐고 하자 그건 내 문제라며 그는 입학금을 선선히 빌려주었다. 당시 경영대학원 1학점당 학비가 100달러, 15학점이니 1,500달러였다, 전철비가 10센트일 때니 상당한 큰돈이었다.

▲할아버지의 육아일기
그 고마운 이 덕분에 그는 컬럼비아 대학원을 다닐 수 있었다. 물론 여름방학 석달동안 식당 매니저, 웨이터, 청소를 하면서 번 돈으로 가장 먼저 그 돈을 갚았고 겨울 코트도 살 수 있었다. 이처럼, 세상에는 살면서 기적 같은 일들이 사람다운 사람에 의해 가끔 생기곤 한다.

민대기는 FIT 출신 패션디자이너 이지희씨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었다. 장남은 현재 코치 아시아담당 시니어 매니저이고 로스쿨을 나온 딸은 결혼후 예쁜 외손녀를 안겨주는 기쁨을 선사했다.

“자서전을 영어로 쓰고 있다. 금년말까지 끝낸 다음 할아버지의 육아일기를 내고 싶다. 현재 외손녀는 4살반이다. 태어난 후 수시로 아이의 성장을 시켜보았다”‘는 그는 ‘미국이름 그레이스, 한국이름 미아‘라고 자랑하는 순간 강한 이미지의 변호사가 아닌 인자한 할아버지 미소만 가득 남았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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