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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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조파운데이션’ 조병창 회장

2015-07-2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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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 자체가 나눔.봉사...행복은 덤이죠”

어릴적부터 어머니 영향으로 배려.봉사 몸에 배
한인회장.한국불우어린이 돕기.장학사업 등 활발
남 위해 살다보니 정작 가족들에 소원 “미안”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불우이웃 사랑실천을 보고, 가슴 깊이 느끼며 자랐다. 나의 삶에서 ‘나눔과 봉사‘는 그저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일일뿐이다’ 삶 자체가 자선사업과 봉사활동인 한인이 있다. 삶의 방식은 나눔과 베풂이다. 가족, 이웃, 한인사회와 조국을 향한 지극한 사랑표현이다. 더불어 남북통일에도 헌신하고 있다. 그는 사랑과 봉사를 통해 스스로의 행복을 찾는다. 주인공은 바로 조파운데이션 조병창(75) 회장이다.

■면장 댁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그는 1939년 경남 합천 쌍책면 덕봉리에서 태어났다. 형 넷, 누나 둘을 둔 7남매의 막내였다. 아버지는 면장이었다. 16년 동안의 치적으로 공덕비가 세워졌다. 아버지는 그의 나이 네 살 때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는 고향에서 6년 개근, 6년 우등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신설된 초계중학교 다닐 땐 배타고, 산 넘어 왕복 15리(6km)를 통학했다. 대구 영남고교를 다닐 때는 가정교사를 했다.


어머니 혼자서 형들을 대학에 보내다 보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대구대학을 다니다 군에 지원했다. 1961년 5.16 혁명이 일어나던 해였다. 제대 후 3학년에 복학했다. 그 해 5급 공무원 국가고시에 합격, 졸업 후인 1965년 문교부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문화공보부, 경제기획원 등에서 8년간 일했다. 공무원 박봉에 사무관 승진을 포기하고 더 큰 꿈을 찾아 1973년 미국 이민에 나섰다. 1971년 결혼한 부산대학병원 간호사인 아내를 앞세웠다. 그 당시 간호사와 약사의 이민이 활발했기 때문이다.

■모국상품 구매사절단을 이끌고
그는 1973년 6월12일 시카고에 도착했다. 3일 만에 무기부품 만드는 강철회사에 취직했다. 월남전이 최고조에 달하던 시절이었다. 초보라 밤11시부터 아침 7시까지 야간 일을 했다. 주급은 괜찮은 편이었다. 밤일이었지만 고생이라 한탄하지 않았다. 힘든 줄도 몰랐다. 그렇다고 즐거운 것은 아니었다. 꼬박 1년 일했다.

그 이듬해 뉴욕으로 옮겼다. 세계의 도시 뉴욕에 대한 매력과 가발장사로 돈을 잘 벌던 고향친구들의 권유에 이끌려. 그는 3개월 가발행상을 했다. 그러다 뉴왁에 가게를 차렸다. 아이템은 가발과 핸드백 등 잡화. 3년 후인 1978년 맨하탄 브로드웨이에 주얼리 도매상인 ‘벤가드 코퍼레이션’을 설립, 30년간 운영했다. 2008년에 아들에게 물려줬다.

그는 1983년 서울올림픽뉴욕후원회 이사장을 맡으며 단체 활동을 시작했다. 1985년에는 뉴욕한인경제인협회 제8대 회장을 역임했다. 그 당시 제1회 모국상품 구매사절단 60명 정도를 이끌고 한국을 방문했다. 1억 달러의 구매실적도 올렸다. 그 후 한국 중소기업대상 해외수출 실무정보 제공 세미나도 마련했다. 모국상품 해외진출 확대를 위해서다.

■‘일하는 한인회, 참여하는 한인회, 힘 있는 한인사회’
그는 제19대 뉴욕한인회장(1986-1988)으로 2년 봉사했다. ‘일하는 한인회, 참여하는 한인회, 힘 있는 한인사회’는 한인회장 출마의 변. 일을 잘 함으로써 참여도를 높이고 그러면 힘 있는 한인사회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그는 한인회관 유지 관리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인회장 상근시대도 고착시켰다. 첫 업무전산화로 업무효율도 높였다. 특별기구 복지재단을 설립, ‘유나이트웨이’와 ‘필립모리스’로부터 4만 달러 보조금도 받았다. 이민국과 협약으로 한인회서 원스탑 시민권 신청을 대행해 획기적인 편의제공으로 큰 호응과 반향을 일으켰다.

적십자와의 헌혈운동, 한국참전용사 위로방문 등으로 한인이미지 향상에도 크게 기여했다. 어린이 예술제, 예술인의 밤 등 각종 문화행사 정례화로 전통문화계승과 한국학교발전에도 이바지했다. 때문에 그에게는 그런 각종 활동들이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되지 못한 것이 더욱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그는 뉴욕한인회 역대회장으로서 한인사회의 현안에 부단한 조언활동도 펼치고 있다. 작금의 한인회 분열사태가 조속히 해결되길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라는 이유다.

■어머니와 고향
그의 삶에서 나눔과 배려, 사랑과 봉사는 지향하는 가치다. 어머니의 영향이다. 홀로 7남매를 키우던 어머니는 넉넉하진 않았지만 동냥 오는 여인네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가족들 것을 나누어서라도 주었다. 추운 겨울에는 당신이 입던 옷들도 선뜻 건넸다. 남을 배려하고 나눔을 항상 보여주었다.

자라면서 어머니로부터 나눔의 의미와 가치를 배웠다. 성장해 나눔과 배려를 자연스럽게 실천하게 된 이유다. 그는 각종 자선사업과 봉사활동을 펼쳤다. 1980년대는 수년 동안 한국 심장병어린이들을 돌봤다. 수술을 위해 미국을 오는 어린이들을 서울서 데려왔다. 병원 입원, 통원치료를 위해 수개월씩 집에서 보살피기고 했다. 이 일은 부인 조인자여사가 더 열성적이었다.

한국불우어린이 결연사업에도 적극 나섰다. 1990년 한국 어린이재단 뉴욕후원회장을 맡아 100여 명을 결연시켰다. 지금까지 10명과 결연을 맺고 매년 2,000달러를 보내주고 있다. 고향사랑이 남다른 그는 1982년 모교 초등학교 어려운학생의 진학을 돕는 ‘도곡(陶谷)장학회’를 설립해 지금까지 계속 유지하고 있다. 도곡은 평생 후배를 양성하라는 그의 타고난 천운(?)으로 지어진 호이다.

2007년 12월 비영리법인으로 순수한 가족재단인 ‘조파운데이션’을 설립했다. 차세대에게 한인의 정체성을 전수하고 어려운 학생을 격려하며 어려운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개인이나 단체를 후원하는 게 목적이다. 2008년부터 뉴욕과 뉴저지 한인회를 통해 매년 15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선발 에세이 주제는 차세대들의 정체성과 자긍심 전수차원에서 ‘뉴욕, 뉴저지 한인회 또는 한인사회’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자체적으로 장학생을 선정한다. 뉴욕한인회의 분열사태 때문이다.그는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어머니와 고향이다. 어머니와 고향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친구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조상과 이웃 더 나아가 사회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남북통일은 구호만으로 안 된다.
그는 남북통일은 나무심고 거름 잘 주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잦은 교류로 동질성 회복과정을 거치면 통일이라는 결과물이 탄생한다는 의미다.

그런 차원에서 그동안 굶주린 북한 어린이들을 돕고자 우유보내기 운동을 펼쳤다. 개성에 가서 밀가루도 전달했다. 사상이나 이념의 잣대로 시샘하는 이들은 개의치 않았다. 통일을 이루는 데 헌신하겠다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민주평통 북미주담당 부의장을 4년 역임했다. 현재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뉴욕상임의장이다. 민주평통과 민화협 등 통일로 가는 두 수레바퀴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남북통일에 정성과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은 변함이 없다. 통일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하나 준비하고 실행해야 한다. 때문에 민간차원에서의 교류와 협력의 시대를 열어가도록 해외동포들의 노력이 절실하다”며 해외동포들의 역할이 크다고 강조했다.

■늘 미안한 가족들
그의 좌우명은 ‘정직과 성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거짓과 요령은 없다.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러다보니 좋은 결실도 맺었다. 문화공보부서 공직생활을 할 땐 장관표창을 받았다. 시인 모윤숙이 주도했던 국제펜클럽서울대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공로다.

미주 한인사회에 대한 봉사와 조국사랑 실천으로 국민훈장인 목련장(노태우 대통령)과 남북협력과 평화통일을 위한 헌신으로 동백장(이명박 대통령)도 수상했다. 성공한 이민자들에게 주는 영예의 엘리스아일랜드 상도 받았다. 1세 이민자로서 숱한 고난과 역경을 딛고 한인사회와 미국사회에 기여한 공로다. 그의 이웃, 고향, 한인사회, 조국과 더 나아가 민족을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이 낳은 결실이다.

또한 그가 삶 자체인 자선사업과 봉사활동 실천의 근본인 나눔과 배려를 소박한 마음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늘 가족들에게 미안해하고 있다. 너무 일찍부터 이런저런 일을 하다 보니 아내,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마음의 표현이다.

그는 ‘이민 1세들이 다 그렇듯이 열심히 살다보니 오히려 가족과 많은 시간을 갖지 못했다. 그런 미안함을 가족에게 전하고 싶다. 지금은 맏아들과 며느리, 두 딸과 사위 둘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다섯 손주들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고 말한다.<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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