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3대와 이어주는 일터 (허병렬 / 교육가)

2015-07-08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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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미국에 흔한 여자 이름이다. 필자는 어느 소녀가 내 팔을 붙잡고 흔들 때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나, 멜시, 오늘 하버드대학 합격통지를 받았어요.” 필자는 그녀의 영리한 두 눈을 보자마자 끌어안았다. 그녀는 내가 12년동안 미국 유치원 교사로 있을 한 때, 내 반 아기였다.

어느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데, 미국 남자가 아는 체를 한다. 내가 눈을 깜박거리자 “그레이스가 내 아들 지미를 맡았었지요.” 그랬었구나! 하지만 20년쯤 경과된 일이니….

“참! 그랬어요. 지미는 어떻게 지냅니까?” 이 이야기도 멜시와 같은 시대의 이야기다. 그들이 현재의 나를 쉽게 알아보는 것은 특색 있는 작은 모습 때문일 게다. 이렇게 옛날을 회상할 수 있는 옛날 필름을 가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여기에 보태서, 요즈음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기쁨이 있다.

그것은 한 가족과 삼대를 이은 인연이 생긴 것이다. “이 애가 제 손자에요. 바로 아들 Y의 아들이니까요.” 이렇게 설명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한국 서울에서 우리 반 학생이었던 S다. S, Y, 그리고 손자까지 학생이 되었다. 이런 인연, 아니면 우연히 쉽게 벌어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서 행복하다. 신나게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데…. 그 방법에 익숙하지 않다.

직업 선택, 이는 어려운 일 중의 하나이다. 미국에 오기 전에 유명한 일본 저자의 미국생활 수첩을 읽었다. 직업 선택 부분에서 그는 말하였다. 수입이 많은 편을 택하라. 정말 그럴까? 인간이기에 앞서는 것이 수입의 많고 적음일까?

직업 선택에서 고려할 점이 많다.

그 중에서 첫째는 본인이 즐길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교사가 된 나는 선친의 의사에 따른 것이다. 여자도 사회생활을 체험해야 하고, 여자도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다행히도 교육실습을 시작하면서 이 일이 즐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사직은 어린 생명체와의 접촉이다. 거기에 가르치는 방법에 창의력이 필요하다. 교육은 인간관계이기 때문에 변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이, 몇 갑절의 즐거움 때문에 일을 계속하게 된다.


누구나 사흘 경험하면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 교사직이란다.

내가 교직에 종사하기 시작한 것은 1944년이니 어느덧 71년이 된다.

일제시대의 1년의 제외하고, 70년이 된다. 미국에서 한국학교에 관계한 지는 50년이다.

하지만 하는 일에 싫증을 느낀 일이 없고, 매일 새날 맞이의 즐거움이 계속된다. 그 이유의 하나는 가르치는 대상이 바뀌는 데 있다.

직업 선택의 첫째는 내가 즐길 수 있고, 직업에 대한 나 자신의 적응 능력이 맞아야 한다. 극단적인 예로는 부모의 염원으로 법대를 나온 학생이, 예술 전공으로 방향을 바꾼 예가 있다.

나는 직업 선택에 성공하였다. 첫째는 어린이들을 좋아하고, 각종 창의력을 요구하는 교수방법을 즐기며, 매번 교육대상이 바뀌는 것도 바람직하며, 젊은 생명력과 어울리는 분위기를 사랑한다. 나에게 직업은 생활을 이어주는 것이 아니고, 건강과 생명을 이어주는 명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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