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커네티컷/ 칼럼: 왜? 삼식이

2015-07-03 (금)
크게 작게
고명선 <수필가>

지인의 집에 저녁초대를 받고 우리 부부는 밤 나들이에 나섰다. 서로가 분주하게 살아가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만찬을 마주하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담소하다 보니 한여름 밤이 생각 보다 길게 느껴졌다. 동포 사회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은 복습이라도 하듯이 대강대강 건너뛰고 자녀들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들도 희망사항으로 훈훈한 마무리를 해 두었다.

두고 온 고국을 향한 일련의 어려운 사건들을 걱정할 때는 환하던 분위기가 잠시 우울해 지기도 했다. 메르스 바이러스 사태, 농번기의 극심한 가뭄, 전진 없는 정치적 분쟁 등등 … 이국땅에서 몸담고 살면서도 뉴스를 볼 때 마다 애가 타는 마음에 가끔은 울분이 넘칠 때도 있다. 빨리 진정 되고 회복되어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너나없이 똑같은 심정이라고 입을 맞췄다.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넘나들다가 요즘 남편에 대한 발제가 식사가 끝나고 난 푸짐한 과일접시 위에 올라왔다 “어쩌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노” 동석한 이웃집 남편의 부산사투리로 시작이 된 남편의 이름은 끝 모를 추락이 계속되었다. 몇 년 전에 유행했던 곰국사건은 가벼운 애교에 불과했다.

부인이 곰국을 끓이면 며칠 동안 집을 비울까봐 남편의 전전긍긍하는 나약한 모습을 회화했던 유머는 웃어넘길 만 했다. 그런데 해를 거듭하면서 고강도 시리즈가 생산되고 점점 스토리화 되어 가는 남편 누르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를 넘어 선 것 같다. 어릴 적 기억의 아버지는 가장이자 스승이고 존경의 대상 서열 앞자리를 지키셨다.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시고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고 품어 주시는 하늘같은 존재였다. 혹여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내 아버지 또 남편은 항상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그것은 불변의 법칙처럼 가정에 존재해 있었다. 전기밥솥이 없었던 시절에는 밥을 하면 제일 먼저 아버지 밥부터 소복이 담아서 아랫목에 묻어 두고 저녁 늦게 귀가하시는 집안의 주인을 기다렸다.

경제적인 발전과 여성들의 직장생활이 보편화 되고 여성상위 시대를 슬로건으로 내걸면서 친구 같은 아버지, 애인 같은 남편을 요구하다가 언제부터인가 아버지와 남편의 이름은 상처로 얼룩진 서글픈 이름이 되어있다.

특히 중년 이후에 퇴직을 하고 별로 하는 일 없이 집에서 소일하는 남편들에게 붙여진 노란 딱지가 “삼식이”란 이름이다. 유머에 이해가 느린 내 머리는 주변의 핀잔과 친절한 설명으로 뒤늦게 폭풍 웃음을 터트렸지만 이 씁쓸한 기분은 무엇이란 말인가? 젊은 날에는 식구들을 위해서 밖에서만 생활하던 남편이 모든 임무를 완수하고 고단하고 지친 삶을 뒤로하고 기다리던 자유로움을 얻었지만 순리라고 여기던 인생스케줄에 엉뚱하게도 삼식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쉴 틈 없이 쓸고 닦으며 자녀들 뒷바라지와 오로지 남편외조에 아낌없이 내 한 몸 내어준 아내들도 이때쯤은 자유를 선언하고 집밖으로 탈출하려는 시기이기에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아내들의 소극적인 몸부림이라 여기고 남편들이여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껏 밥순이로 살아온 아내를 위로하시고 세끼 밥을 맛있게 드시는 삼식이가 되시라고 권면을 하면 안 될까요?

삼식이라도 옆에 있어 외롭지 않고 살아가는 의미를 누리고 있으니 아내들이여 더욱 섬기자고 말하면 혹시 야유라도 하실 건가요? 이민 사회하고는 조금은 동떨어진 이야기 같지만 어느새 우리도 물이 들어 뒷등에 재미로 퍼 나르고 있지 않은가. 삶의 방식은 다양하고 생각하기 나름인데 나만 아프다고 소리 지르면 상대방의 고통은 더 없이 커질 것이다.

점점 멀어져 가는 자신감과 싸우는 남편도 작은 변화에도 예민해지고 불안한 아내에게도 진정한 이해와 사랑이 필요한 위로 받을 존재라는 인식을 서로에게 확인해 주며, 곧 다가올 우리 세대에 지혜롭게 풀어 나가야 할 숙제로 탁상공론 같은 발제를 마무리했다.

푸짐한 저녁식사는 고갈되었던 감정과 웃음을 퍼 올리며 심히 깊어져 가는 밤도 잊고 계속되었다 “서로가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면서 동반자가 있음은 얼마나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인지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시던 노년의 명교수님 말씀을 새삼 되새기며 깊어진 밤 오던 그 길을 낯설게 달린다. 새로운 마음으로 ….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