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30초면 될 일 (김덕환 / 부동산중개 및 종합금융업)

2015-06-2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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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신간,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를 펴냈다고 한다. 이에 관한 저자와의 대화를 읽어보니, 치열하게 살다 3년 전 지병으로 세상을 먼저 떠난 따님 (고) 이민아 목사에 대한 회한이 깊다. 부녀 간에 못 다 나눈 정에 대한 아픔이 절절히 묻어난다.

78년 1월 고교 졸업을 앞두고 당진의 친구 집에 간 적이 있었다. 부산에 계신 조모께 인사드리러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천안역에서 흔들거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4시간 가까이 지루하게 달린 끝에 언덕 위 예배당 종소리가 은은한 친구네 시골집에 도착했다.

친구가 다닌 초등학교도 둘러보고 파장 무렵 장터에서 호떡도 사먹으면서 동네 구경을 했다. 그러면서 머뭇거리는 듯, 그러나 성큼성큼 다가오는 우리들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이런저런 청춘의 고민을 나누었다.


저녁을 먹고 친구와의 이야기도 잦아들 무렵, 나는 그 시골집 서가에서 당대의 지성인으로 알려진 이어령 교수의 책을 한권 발견했다. 책을 집어 들고 침침한 형광등 아래에 누워서 책장을 넘겼다.

제목은 아련하지만,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번지던 비트 리듬, 디스코 등과 같은 새로운 문화에 관한 단상을 담은 수필집이었다. “지성인 대열에 들어가려면 꼭 읽어 두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집중하며 읽긴 했지만 덜 익은 풋 청춘에 불과했던 나에겐 어려운 내용들이었다. 그래서 “참 박식한 교수님이시구나”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니까 이번의 신간은 이 전 장관이 약 40년 전 한적한 충청도 시골에서 내가 읽었던 바로 그런 책들을 열심히 쓰느라 딸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데 대한 회한을 담은 것이다. 부정에 목말라 하던 어린 딸에게 겨우 30초면 될 짧은 굿나잇 키스도 못해줄 정도로 매정하고 못난 아비였음을 가슴 아프게 후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생은 연습이 없어 누구나 저마다의 역할에 서투른 채 한평생 살기 마련이라는 대목에는 퍽 공감이 된다. 맞다. 우리는 모두 서투른 부모, 서투른 배우자, 서투른 자녀로 살고 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도 자신의 고집대로 열심히 살면서 세상을 바꾸느라 바빴는지, 이곳 실리콘밸리에서 차로 불과 2시간 거리인 새크라멘토에 살고 있던 시리아계 생부를 끝내 만나지 않고 세상을 떴다. 미국에서 많이 듣는 말 중에 ‘생물학적 아버지/어머니’가 있는데, 그 사람과는 생물학적으로 부자(모자) 관계일 뿐, 아무런 영혼의 교류는 없는 사람이라고 격하하는 표현이다.

생부가 아무리 자신을 버렸다 해도 그래서 생물학적인 아버지일뿐이었다 해도 잡스가 최소한 죽기 전에는 한번 만났어야 하지 않았을까? 범부인 나는 그를 속으로 나무라 본다.

언젠가 죽음이 우리를 영원히 갈라놓기 전에, 존경과 사랑과 화해를 표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꼭 그렇게 했으면 한다. 지금 하던 일 잠시 멈추고 전화라도 한번 걸어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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