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 빠에야의 고장 발렌시아… 포도밭 풍경과 와인 리오하
▶ 스페인 전통관습 ‘시에스타’ 오후 2~5시 상점 문 닫아
[SPAIN (1)]
새벽 다섯 시 좀 넘었나, 친구가 깨워서 눈을 떠보니 호텔 창밖으로 먼동이 터오고 있다. 일출을 본 게 언제였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렸을 적 수학여행때 단체로 토함산에 기어올라 별 감흥없이 보고 내려온 게 전부인 것 같다.
서울 토박이에다 서부 캘리포니아에서만 30년 넘게 살다보니 석양은 많이봤어도 바다에서 해 뜨는 광경은 절대로 볼 일이 없었던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일출, 이베리아 반도의 동쪽 끝에 세워진 W 호텔 14층에서 스페인 여행 첫날을 맞이한 기막힌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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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말부터 6월 초까지 스페인을 여행했다.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에서 시작해 빠에야의 고장 발렌시아와 와인산지 리오하를 거쳐 화려한 수도 마드리드까지, 14박15일의 넉넉한 일정으로 스페인의 풍요로운 예술과 건축, 와인과 문화에 흠뻑 빠져본 시간이었다.
2주 동안 스페인 한 나라만 보고왔다고 하면 구석구석 다 돌아다녔겠다고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스페인의 매력인 이슬람 아랍문화의 자취가 깊게 새겨진 그라나다와 세비야, 코르도바 등 남부 지역은 가보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꽃보다 할배’를 열심히 본 사람들이 나보다 더 자세히 스페인을 구경했을지도.
바르셀로나와 발렌시아는 해안가에 위치한 도시라 여유롭고 쾌적한 분위기였고, 끝없이 포도밭이 펼쳐지는 리오하는 절대로 잊지 못할 아름다운 풍경과 와인의 향기를 선사했다. 고색창연한 역사와 함께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마드리드는 대도시의 역동성이 살아 숨 쉬는 멋진 도시, 구겐하임 뮤지엄 하나로 도시 전체가 살아난 빌바오는 그 놀라운 생기와 생존력에 경의를 표하게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번 여행의 백미는 이런 큰 도시들이 아니라 그 중간 중간에 잠깐씩 들렀던 소도시들이었다. 토르토사(Tortosa), 자라고사(Zaragoza),라과르디아(Laguardia), 브리오네(Briones), 에즈카라이(Ezcaray), 부르고스(Burgos) 등 이름도 기억하기 힘든 수많은 도시를 방문했는데 하나같이 그림처럼, 사진처럼, 엽서처럼 아름다웠다.
어느 도시를 가든지 만나게 되는 광장과 성당은 모두 비슷한 듯하면서도 각기 특별했고, 어느 골목이든지 카메라만 들이대면 그대로 작품이 될만큼 수려한 풍경과 고즈넉한 장면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런 것은 꾸며서 되는 일이 아니고 오랜 세월 축적된 역사, 시간의 색, 세련된 문화, 성숙한 삶과 공동체 의식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페인의 5월과 6월은 캘리포니아의 날씨와 비슷한, 아주 쾌적하고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본격적인 관광시즌은 7~8월 시작되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많지 않아 좋았고, 어딜 가나 깨끗한 거리, 맑은 공기에 하늘도 구름도 아름다웠다.
한가지 놀랍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던 것은 스페인의 전통관습 ‘시에스타’ (Siesta)였다. 점심식사 후 오후2시부터 4~5시까지 문을 걸어 잠그고 낮잠을 자거나 휴식을 취하는 이 사람들의 풍습은 얘기는 들어봤지만실제로 그 경험을 하게 되니 참으로 생소하고 황당했다.
거리는 텅 비고 상점들은 문을 닫았으며 도시 전체가 멈춘 듯 조용했다. 처음엔 영문을 모르고 왜 이렇게 문 닫은 상점이 많을까, 스페인의 도시들은 참 조용하다, 사람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갸우뚱했었다. 물론 대도시는 풍경이 조금 다르지만 문 닫는 곳이 많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제대로 된 점심을 먹기도 힘들 뿐더러 샤핑은 더더군다나 불가능했다. 더러 문을 열고 있는 식당이나 커피샵, 상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곳은 주로 관광객을 위한 곳이라 발길이 가지를 않고, 쇼윈도 안에 사고 싶은 물건들이 잔뜩 쌓여 있는 스토어에는 들어가 볼 수 없었던 비애를 여자들은 이해하리라.
그러니 스페인의 저녁은 유럽에서도 제일 늦은 것으로 유명하다. 디너식당들이 문 여는 시간이 오후 9시, 젊은 사람들이 춤추고 노는 클럽은 자정에 문을 열어 새벽 4시까지 북적인다고 한다. 하긴 여름이라 일조시간이 길어서 밤 10시가 되어도 하늘이 훤한 것이었다.
또 하나 거슬렸던 것은 스페인 사람들 어찌나 담배를 피워대는지 길을 걷다보면 반드시 어디선가 담배연기가 날아오는 것이었다. 남자고 여자고 젊은이고 노인이고 할 것 없이 담배를 물고 다니는 사람이 워낙 많은데 미국처럼 공공장소의 흡연규제 같은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스페인의 대표음식은 하몽과 초리조(소시지의 일종), 타파스, 빠에야를 들 수 있다. 하몽(jamon)은 돼지고기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시원한 바람에오랫동안 말린 햄으로, 맛은 프로슈토와 비슷하다. 어디가나 얇게 썬 하몽이 애피타이저나 안주로 나오고, 하몽과 치즈만 넣은 바게트 샌드위치는 미국의 햄버거만큼이나 대중적이었다.
타파스(tapas)는 요즘 미국식당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는 한 입 음식으로, 많은 식당이나 카페, 바들이 여러 종류의 타파스를 만들어 진열하고, 사람들은 와인이나 맥주 한 잔을앞에 놓고 타파스 한두 개씩 시켜서간식, 혹은 안주처럼 먹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빠에야에 관해서는 발렌시아 여행편에서 소개하련다.
스페인에서 와인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음료라 해도 좋을 만큼 언제나 식사에 동반한다. 프랑스,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와인을 많이 생산하는 나라이고, 양조 역사도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랜 전통을 갖고 있어서 상당히 좋은 와인들을 많이 만들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곳이 와인산지 리오하(La Rioja)였고, 스페인 와인에 대해 보다 많이 이해하게 돼 흡족했다. 주로 미국인 노부부들로 구성된 이 여행그룹에 조인한 이유도 와인산지와 와이너리 방문, 와인 뮤지엄 투어 같은 일정이 많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며,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마르케스 데 리스칼(Marques de Riscal) 와이너리 안에지은 호텔에서 묵었던 닷새는 참으로 황홀한 시간이었다.
<글·사진 정숙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