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3년 유엔총회서 북.중공군 만행 규탄결의안 채택
6.25 전쟁이 한창 치러지고 있는 1950년 12월1일 끊어진 한강다리 아래 옆에 놓아진 임시다리를 건너는 피난민 행렬.<사진=유엔>
주유엔 미국대표부가 1953년 10월30일 유엔사무총장에게 제8차 유엔총회 공식안건에 북한과 중공군이 6.25 전쟁 당시 한국에서 유엔군 포로들과 한국 민간인들을 상대로 저지른 ‘만행’ 문제’를 포함시켜달라고 요청한 편지.
‘유엔군.민간인 상대로 저지른 만행’ 공식의제 논의
총 1,615건 중 8개 사건 기록파일 회원국들 회람
50년 9월 대전서 발생한 5,000명 학살사건 눈길
<유엔본부=신용일 기자> 유엔 총회는 6.25 전쟁 정전협정 체결 후 불과 5개월만인 1953년 12월3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과 중공군이 유엔군 포로들과 한국 민간인들을 상대로 저지른 각종 ‘만행들’(atrocities)을 규탄하는 결의안(A/804(VIII))을 채택했다.
결의안은 전쟁 중 적군 포로들과 민간인들의 인도주의적 대우를 규정한 국제 법을 상기시킨 뒤 “북한과 중공군이 한국에서 유엔사령부 자휘아래 용감하게 싸운 군인들과 한국 민간인들을 상대로 여러 건의 비인도적인 행위를 가한 보고서들과 정보들에 ‘매우 심각한 우려’(grave concern)를 표 한다”며 “그 어떠한 정부 또는 체제의 포로가 된 군인 또는 민간인들을 상대로 한 살해, 신체절단, 고문과 그 이외 만행은 국제 법과, 도덕적 행위에 대한 기본기준을 위반한 것으로 인권과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무시하는 행위이기에 규탄 한다”는 내용이다.
■ 주유엔미국대표부 유엔에 공식안건 채택 요청
유엔본부 ‘다그 함마르셀드 도서관’(Dag Hammarskjold Library)에 보관돼 있는 기록에 따르면 제8차 유엔총회는 이날 제467차 본회의에서 ‘북한과 중공군이 한국에서 유엔군을 상대로 저지른 만행들 문제’를 공식의제로 논의한 뒤 이 같은 문안을 담은 결의안을 가결했다.
회의는 헨리 카봇 로드지 주니어 유엔 총회 미국대표단장이 앞서 1950년 10월30일 함마르셀드 유엔사무총장에게 편지(A/2531)를 보내 제8차 유엔총회에 ‘북한과 중공군이 한국에서 유엔군을 상대로 저지른 만행들 문제’를 공식의제로 포함시켜 줄 것을 요청함에 따라 열렸다.
로드지 주니어 유엔 총회 미국대표단장은 이 문제의 유엔총회 공식의제 포함을 요청한 하루 뒤인 1950년 10월31일 함마르셀드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A/2531/Add.1)에서 공식의제 포함 요청 이유와 필요성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 문건은 “유엔이 한국에서 침략을 격퇴하고 국제 평화와 지역 안보를 복원하기 위해 행동을 취한 도중 북한과 인민군이 여러 차례에 걸쳐 저지른 만행들에 대한 증거를 발견했다”며 “이들 만행은 유엔군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민간인들을 상대로도 저질러졌다”고 고발했다.
문건은 이어 “광범위하고 조심스럽게 진행된 조사 결과 수만 명에 달하는 유엔군과 한국 민간인들이 북한 또는 중공군에 붙잡힌 뒤 구타, 고의적으로 계획된 굶주림, 냉혈적인 고살(cold-blooded murder), 신체절단과 고문으로 살해된 사실이 이제야 확인됐다”며 “이들 만행의 규모와 성격은 유엔 총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제기돼야한다”고 주문했다.
문건은 그 이유를 “이들 만행은 특히 유엔 결의에 따른 권한으로 침략에 대한 집단행동을 취한 유엔 회원국 군인들을 상대로 행해져 유엔 총회의 지속적인 관심사 요소들이 다소 포함돼 있다”며 “미국 정부는 오직 최근에 이루어 이 문제를 유엔 총회의 적절한 조치를 위해 상정할 수 있을 정도 수준까지 도달한 조사 결과를 진척시켰다”고 밝혔다.
로드지 주니어 유엔 총회 미국대표단장은 이어 1950년 11월26일 유엔 주재 미국대표부 대사 자격으로 함마르셀드 유엔사무총장에게 총 176페이지에 달하는 미국 정부의 조사 결과 보고서를 제출하고 유엔총회 공식문건으로 회람을 요청했으며 문건은 같은 날 유엔총회 공식문건 A/2563호로 회원국들에 회람됐다.
■ 만행 피해자 총2만9,815명
로저 P. 키스 미 국방부 차관이 1950년 11월23일 미 국무부에 보낸 뒤 로버트 머피 미 국무부 차관 대행이 하루 뒤인 같은 달 24일 유엔 총회 제출을 위해 로드지 주니어 유엔대사에게 전달한 이 보고서는 6.25 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North Korean Army), 북한 정치보위부(North Korean Political Security Police)와 중공군(Chinese Communist Forces)이 유엔군과 한국 민간인들을 상대로 저지른 것으로 조사, 확인된 총 1,615건 만행 중 8개 사건 기록에 불과하다.
키스 미 국방부 차관은 이와 관련 “선별된 사건들은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모든 사건들의 파일은 분량이 너무도 방대해 미국 (유엔) 대표부가 제출하기에는 비현실적”이라며 “이들 8개 사건 파일은 미 국방부에 보관돼 있고 만일 만행의 성격을 추가로 입증하는데 필요할 경우 나머지 사건 파일들은 한국에 있다”고 설명했다.
키스 미 국방부 차관은 또 “이들 만행 사건은 유엔군 포로들과 한국 민간인들을 상대로 저질러졌다”며 “만행들 상당 건은 유엔군이 진격할 때 이뤄진 것으로 공산당 손아귀에 있던 유엔군 포로들과 민간인들을 아군이 구출하기 전에 살해한 의도를 보여 준다”고 분석했다.
키스 차관은 이어 “포로들은 전쟁 규정이나 관례,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일반적 예절이 모두 완벽하게 무시돼 냉혈적으로 총살됐고, 수용소 건물에서 살아있는 상태로 불에 타 죽었고, 매를 맞아 죽었다”며 “또 다른 경우들의 증거는 공산당들이 고의적으로 포로들을 없애버리기 위해 혹한의 추위에 굶주림과 전염병, 치료 받지 못한 상처, 또는 극도로 허기진 상태에서 죽어가도록 쉽게 살인하는 강제행군을 이용했다”고 덧붙였다.
키스 차관은 이외에도 “마지막으로 전쟁 후방의 포로집결소, 고정, 또는 임시 포로수용소와 그곳들 사이의 행군 과정에서도 만행들이 저질러졌다”며 “공산당들은 포로들로부터 자백을 받아내고, 공산당 선전선동을 지원토록 하고, 수용소에서 다른 포로들에 대한 밀고자들로 만들기 위해 포로들을 굶기고, 의료제공을 거부하고, 구타를 하고, 대놓고 총살을 하기까지 했다”고 지적했다.
키스 차관에 따르면 미 국방부가 조사한 사건 파일에는 총 2만9,815명에 달하는 만행 피해자 관련 증거가 담겨있으며 그 중 1만1,622명이 유엔군, 1만7,354명 민간인, 839명이 신원불명자이다.
■ 대전서 이틀간 5,000명이나 학살
유엔총회에서 회원국들에 회람된 8개 만행 사건 조사결과 보고서 중 가장 눈길을 끄는 파일은 사건은 사건번호 28A로 1950년 9월26∼27일 대전에서 발생했다.
파일은 피해자를 1,000명∼5,000명 국군과 민간인들, 42명 미군으로 기록했으며 가해자를 “당시 대전을 점령하고 있던 ‘북한의 보위부’(North Korean Internal Security (Police) Agency) 소속 요원 전원”으로 밝히고 있다.
당시 학살에 직접 가담한 인민군 포로들과 학살의 유일한 생존자인 미군 하사, 학살에서 살아남은 한국 민간인 수감자, 유엔군이 대전을 되찾은 뒤 살해된 미군 시체들을 첫 발견한 미군 대장의 진술 내용 등이 담겨있는 이 파일은 미군과 국군, 한국 경찰과 민간인들에 가해진 만행을 시간대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파일은 “유엔군이 대전으로 진격할 때인 1950년 9월26∼27일 그 도시는 대량학살 현장이 되었다. 한국 민간인 정치범과 유엔군들이 포함된 많은 수감자들이 북한경찰에 의해 처형됐다. 피해자들 중에는 미군 42명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그날 이틀 사이에 대전에서는 최고 5,000명에 달하는 한국 민간인들이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피해자들 중에는 많은 여성들이 포함돼 있었고 그들 중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있던 사례들도 발견됐다. 일부 수감자들은 살해되기 전에 고문을 당하거나 구타된 흔적이 남아있었다.
천주교 성당 지하실과 뜰에서 수백구의 시체가 나왔다. 각각 30피트 넓이의 6개 구덩이에서 피해자들의 시체가 드러났다. 성당은 이전에 북한인들이 한국 민간인들을 취조하는 장소로 사용됐었다.
모든 미군과 국군들은 형무소에 수감돼있었다. 그들은 1950년 9월27일 이른 아침에 수감장소에서 손이 묶인 채 뜰로 끌려 나가 담 벽을 따라서 파여진 구덩이에 집어넣어져 총살된 된 뒤 흙으로 덮어졌다. 대전 형무소 뒤 언덕과 연경강(Yongoyong River) 강가에서 여러 시체가 발견됐다.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시체는 총상 이외에도 신체절단 흔적이 남겨져있었다”고 사건을 정리해 6.25 전쟁 당시 북한과 중공군이 저지른 반인도적 범죄의 끔찍함을 유엔 회원국들에게 고발했다. yishin@koreatime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