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빛 (최효섭 / 아동문학가·목사)

2015-06-0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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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얼마나 필요한지는 정전만 되면 실감한다. 미 동북부 최악의 정전 사태는 1965년에 발생하였다. 나이아가라 근방 온타리오 발전소의 고장으로 뉴욕 북부 6개 주가 일제히 캄캄해져서 3,000만 명이 흑암 속에 갇혔다. 80만 명이 지하철에 묶였으며 공항은 폐쇄되고 엘리베이터는 그 순간에 멈춰 섰다.

발이 묶인 사람들은 그랜드센트럴 정거장에서 새우잠을 잤고 뉴욕의 장엄한 야경은 물론 볼 수 없었다. 1977년 정전 때는 미 동부 일대가 수라장이 되었다. 많은 무리가 강도로 변하여 가게에 침입, 물건을 탈취하는 대 혼란이 벌어져 세 명이 죽고 4,000명이 체포되었다. 어둠은 범죄를 자극한다.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모두 받은 폴란드 태생 마리 퀴리(1867-1934)는 파리 소르본느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어린 외국 유학생이 학비를 조달할 길은 없었다. 고향 친구들이 ‘폴란드의 천재를 살려 조국에 빛을 비추자!’는 운동을 일으켜 정부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4년 후 장학재단은 퀴리로부터 장학금 전액을 되돌려 받고 매우 놀랐다. 이런 메모가 적혀 있었다. “내가 빛을 받아 소생하였으니 나도 누군가에게 작은 빛을 던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인류의 역사는 빛을 나르는 자들에 의하여 발전한다.

헬렌 켈러는 어떤 좌절한 청년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얼굴을 태양 쪽으로 향하시오. 그러면 당신의 그림자를 보지 않게 될 것이오.” 이 반대말은 자기의 그림자를 보려면 태양을 등지면 된다는 말이 될 것이다.

133년 전, 즉 1882년 9월 4일에 맨하탄에 처음으로 전등 400개가 밝혀졌다. 토마스 에디슨의 ‘펄스트릿 전력회사’(con-Edison의 전신)가 시공하였으며 그 날짜 뉴욕타임스의 기사가 매우 재미있다.

“오늘 3시 본 사옥에 전등이 켜졌다. 에디슨 씨에 의하면 이 전등은 지진이 없는 한 영구히 켜질 수 있다고 한다. 도로 밑으로 전선을 까는데 에디슨 사장 자신이 공사하였다. 그는 벽에 많은 구멍을 뚫고 전선을 연결하였으며 계란 모양의 유리알을 방방에 매달았다.

나사를 틀기만 하면 불이 오는데 너무 가까이서 보면 눈이 부셔 좋지 않다. 성냥은 필요 없다. 가스 등에 비하면 수 십배 밝으며 수 백배 광도가 고르다. 7시가 되어 밖은 어두워졌지만 편집실 발송부 등, 모든 방들은 구석구석까지 마치 낮과 같이 밝아 우리 사원들은 함성을 올렸다.”사람은 결국 두 종류이다. 빛을 향하여 사는 사람과 어둠을 향하여 사는 사람이다. 전자는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며 세상을 아름답게 보고 사랑이 결국 미움을 극복하리라는 확고한 소망으로 사는 자이다. 후자는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싸워 이기는 자만이 행복한 미래를 소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는 세상은 사단(악마)이 지배하는 곳이라고 믿는다.

어둠을 만드는 사람이 될 것인가, 어둠 속에 묻혀 사는 인간이 될 것인가, 어둠을 깨치고 빛을 창출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이 선택에 따라 소위 보람의 농도가 결정된다. 성경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이사야서 60:1)”고 말한다. 빛으로 오신 예수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게 하라”(마태복음 5:14-16)고 분부하셨다.

고대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가 하루의 시작을 해가 뜰 때로 잡은 것은 의미가 깊다. 어둠을 추방하는 태양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밝은 소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밝아지려면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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