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도나 (김희봉 / 환경엔지니어·수필가)

2015-05-26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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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세도나에서 돌아오자 붉은적벽(赤壁)들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햇빛이 오렌지색 불꽃처럼 돌산의 벽을 어루만지며 타오르는 그 광경을 오래 기억하고 싶은 듯했다. 세도나를 병풍처럼 둘러싼 적벽들은 그 웅장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군림하지 않았다. 마치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듯 마을을 감싸고 있었는데 그 불그레함은 모닥불처럼 따뜻했다.

“세도나로 갑시다. 달력에서만 보던 저 신비로운 붉은 돌산 아래 서서 마음껏 하늘과 땅의 기를 받고 옵시다.” 20년 지기 C형 부부를 부추겨 함께 행장을 꾸렸다. 오랜 세월 쉼도 없이 주야장천 일만 하며 살아온 그들이 애처롭기도 했다. “눈 딱 감고 떠납시다. 이젠 일도 쉬어가며 할 때가 되었소. 여행만한 보약도 없다는데 같이 한 첩 다려먹고 옵시다.”세도나는 북 애리조나 사막의 일부라고 했다. 4,500피트 고원지방의 온화한 기후 속에 유독 맑은 하늘, 손때타지 않은 삼림과 형형색색의 지형이 빚어내는 조화 때문에 소문대로 신비감 넘치는 곳이었다. 근처의 그랜드캐년처럼 위압적이지 않고, 소노란 사막처럼 황량하지 않고, 콜로라도 산정처럼 고독하지 않았다.

레드 락(Red rock) 공원에 들어섰다. 멀리 형형색색의 기묘한 붉은 암석들이 보인다. 햇빛에 따라 불그레한 자색이 돌기도 하고, 분홍빛이 흐르다가 귤황색으로 바뀌기도 한다. 산세에 압도되어 서있는데 문득 머리 위에서 솔개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친다. 문득 내가 잊고 살았던 게 상상력임을 깨닫는다. 상상력은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비밀코드가 아닌가.


그제서야 중앙부에 우뚝 솟은 바티칸 성당의 돔이 보인다. 그 좌우로 도마뱀 머리, 낙타등이 꿈틀거린다, 거인의 엄지, 쌍둥이 바위 옆에서 커피 팟이 끓는다. 그 곁엔 스누피도 혀를 빼물고 늘어지게 자고 있다.

“세도나엔 볼텍스(vortex) 에너지라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합니다. 강한 기운이 회오리처럼 용솟음치는 몸의 혈(穴)과 같은 곳이라지요. 지구 상에 모두 21군데 볼텍스 혈이 있는데 이곳 세도나에 4군데나 있답니다.” 안내자의 설명이다.

반신반의하면서도 볼텍스가 전자장(電磁場)이라면 세도나의 붉은 흙에 포함된 철분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옛날 바다였던 이곳 사암 속에 녹아있는 철분 때문에 세도나가 붉다. 그런데 이곳 특유의 강렬하면서도 신비한 적색은 산화된 철분, 즉 쇠의 녹이 시간이 갈수록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치 사람도 나이 들수록 익은 성품이 나오듯이.

근 900년 전의 인디안 유적지, 몬테주마 캐슬을 찾았다. 절벽 안에 만들어진 5층 공동주택지다. 앞에 흐르는 강물로 농사를 지은 흔적이 있다. 옥수수, 호박, 목화 등을 키웠다고 한다. 40여 개 되는 방마다 도토리 빻던 돌 접시 절구들이 놓여있다. 나무 사다리로 연결된 옥상의 망대가 인상적이다. 망대 위에서 외적과 맹수의 침입을 끊임없이 살폈고, 하늘과 땅에서 갑자기 벌어지는 천재지변을 두려운 마음으로 망보았을 것이다.

문득 그들의 군집생활이 우리들 이민생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민초기부터 낯선 이국 땅에서 발붙여 보려 안간힘을 쓰며 불안과 두려움으로 사방을 경계해 온 우리들의 모습. 그러나 오늘 그 막연한 불안감을 털고 바라보는 붉은 절벽은 평온하다. 치유와 위로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감사의 생각도 솟구친다. 이것이 자연과의 교감일 것이다. 몸과 마음에 보약이다. 일에 매여 살아온 이민 1세 우리 모두가 받아야할 치유일 것이다.

아내는 일주일 만에 그림을 완성했다. 화폭에 담긴 세도나의 적벽은 석양이 아닌 새벽 여명의 빛이 희망처럼 떠오르고 있다. 동트는 하늘을 향해 모처럼 마음의 혈을 열고 두 손을 모은다. 새벽의 에너지를 코로 마음껏 들이쉰 뒤 천천히 배꼽 아래로 모아본다. 살아있다는 기쁨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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