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가방’에서 사장까지 “짜장면 박사 다됐죠”
“세상에서 가장 맛나게 짜장면을 만드는 사람”자부
30여년을 주방에서...몸엔 영광의 상처 가득 “그래도 행복”
잘 자라준 딸들 고마워 선행 앞장서는 딸바보 아빠
중식업계에서 30년 넘게 외길인생을 걷고 있는 한인이 있다. 그는 배달부터 시작해 주방보조와 주방장까지 거쳤다. ‘준비된 창업자’였다. 밑바닥부터의 경험을 체험한 것이 중국집 주인이 돼서도 장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이었던 셈이다.
그는 10대에 중식업계에 뛰어들어 숱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래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한 길을 걸어왔다. 주인이 된 현재도 희망 레이스는 계속하고 있다. 멈추지 않고 내일을 향해 꾸준히 나가고 있는 주인공은 중국집 장내환(51) 사장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전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배달부터 중국집 사장까지
그가 처음 중식업계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2년. 33년 전이다. 서울 무교동에 사촌형이 주방장으로 있던 중국음식점에서 배달부터 시작한 것. 나이는 18세.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을 때이다. 철가방을 들고 처음 배달에 나설 때는 힘들었다.
서울이란 낯선 곳에서 주소 찾기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배달 전에 주소를 먼저 확인하곤 했다. 제 시간에 음식을 배달해야겠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어느 날은 탕수육을 배달하면서 슬쩍 한, 두 개를 꺼내 먹었다. “왜, 그때는 그렇게 탕수육이 먹고 싶었는지, 참으로 배고픈 시절 이었다”고 회상한다.
몇 해가 가고 배달에서 벗어나 주방 일을 배웠다. 그릇 닦고, 칼질하고, 손으로 국수도 만들고, 프라이팬 요리도 배웠다. 어깨너머로 요리를 배우며 차근차근 실력을 쌓았다. 주방에서 일을 하며 국자로 이유 없이 많이 맞기도 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요리하나라도 더 배우려면 주방장 빨래도 해주며 비유도 잘 맞춰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하루하루는 힘들고 서럽기도 한 나날들이었다. 그는 1987년 국가 공인 중식 조리사 자격을 취득했다.
배달의 허드레 일부터 주방 일을 하면서 5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그 후 또 5년 동안은 주방장의 경험과 실력을 축척했다. 그러다 중식업계에 뛰어든 지 10년 만인 1992년 일산 신도시에 자신이 운영하는 중국집을 차렸다. 28세 때 중화요리 전문점인 ‘한성각’의 총각사장이 된 것이다. 다음해 아내와 결혼했고 그 이듬해 첫 딸도 얻었다. 그리고 3년 만에 역삼동으로 가게를 옮겼다.
‘궁중요리처럼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손님에게 대접하고 싶은 마음’에서 상호는 ‘경회루’로 정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니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일산에서는 배달이 많아 주말에 쉬기 어려워서 주말이 좀 더 자유로운 역삼동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말한다. 그는 역경을 딛고 사장의 자리에 올랐지만, 돈 보다는 가족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뉴욕서도 중국집을 차리고
그는 1999년 서울에서 잘 되던 장사를 접고 뉴욕에 왔다. 외동딸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그 해 혼자 뉴욕에 와서 직장과 집을 구한 뒤 한국에 가서 아내와 딸을 데려 왔다. 우선 중국음식점에서 4개월 정도 주방장 생활을 한 뒤 2000년부터 중국집 운영에 나섰다. 플러싱 유니온 상가에 ‘웃기는 짜장 집’을 차린 것이다.
3년 동안 장사를 하던 그는 한국에 계신 아버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웃기는 짜장 집을 접어야 했다. 그리고 친구와 동업으로 중국에 ‘떡 공장’을 차렸다가 2년 만에 쫄딱 망해 알거지 신세가 됐다. 그는 2005년 뉴욕으로 다시 돌아왔다. 2년 동안 재기를 꿈꾸며 주방장 생활에 전념했다. 그랬더니, 2007년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은행과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먹자골목에 중국음식점을 차릴 수 있었다.
상호는 사람들이 쉽게 생각할 수 있고, 부르기 쉬우며, 기억하기 좋은 ‘중국집’으로 정했다.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다. 다행히 생각보다 장사가 잘 됐다. 주인이 아닌 주방장 생각으로 운영하다 보니 지난 2014년에는 자체 건물을 구입해 중국집 베이사이드 지점도 개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 중국집 사장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중국집은 “주인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기에 맛으로 행복한 집”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간짜장이 없는 중국집
그는 가장 보편적이고 기본에 충실한 짜장면, 짬뽕, 탕수육을 잘 하는 중국집의 음식 맛이 좋다고 한다. 맛있는 짜장면과 짬뽕의 비법은 신선한 재료와 푸짐한 인심이라고 귀띔한다. 그래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시장을 보러 간다.
그가 운영하는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짬뽕이 인기 있는 이유다. 요즘 새롭게 선보인 메뉴 중에는 도미에 매운 소스를 가미한 라조도미 생선요리를 찾는 고객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무더위가 시작되는 6월부터는 시원한 콩국수가 등장한다고. 또한 새로운 스타일의 차가운 중국음식도 깜짝 메뉴로 선보일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는 20년 넘게 중국집을 운영해 오면서도 일주일에 다섯 번 이상 짜장면과 짬뽕 밥을 먹는다. “물리기는커녕 너무 맛있다. 중독된 것 같다”고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는 ‘나는 짜장면을 세상에서 가장 맛나게 만드는 사람이란 내 자존심을 믿는다’고 한다. 30년 이상 쌓은 내공으로 짜장면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집을 운영하면서 단 한 번도 ‘간짜장’을 판매한 적이 없다.
중국음식은 빨리빨리 요리를 해야 한다. 그런데 간짜장은 조리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바쁘다고 미리 만들어 놓으면 진짜 간짜장이 아니다. 그래서 아예 메뉴에 넣지 않는다. 그의 비즈니스 철학이 음식 맛뿐 아니라 진실과 솔직한 것을 중요시 여기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6일 주방장 일을 하는 그의 몸에는 ‘영광의 상처’가 가득하다.
30년 전 주방 일을 배우며 끓는 물이 가득한 솥이 엎어져 가슴에 생긴 흉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왼 손등은 끓는 기름에 손이 담겨 피부 색깔이 다르다. 요리를 하다 기름이 튀거나 프라이팬에 데거나 칼에 베인 상처의 흔적도 남아있다.
그는 주방장은 의사보다 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의사는 아픈 사람을 고치지만 주방장은 음식으로 치료도 하고, 미리 병을 예방해 아프지 않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고객서비스를 중요시 여긴다. “손님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하도록 미소와 친절을 베풀어라”고 교육한다. 직원들의 ‘친절과 정성’이 담긴 서비스가 바로 ‘고객만족’이기 때문이다.
나눔의 선행을 베푸는 ‘딸 바보 아빠’
그는 큰 딸의 교육을 위해 뉴욕으로 왔다. 1999년 미국에 온 기념으로 아내와 합의(?)로 이듬해 작은 딸도 얻었다. 그가 한인사회에서 행하는 나눔의 선행의 배경에는 늘 두 딸이 자리하고 있다. 2001년 작은 딸 돌잔치는 그 당시 ‘웃기는 짜장 집’에서 하루 문을 닫고 이웃 어르신들을 모시고 음식대접으로 대신했다.
어르신들의 “예쁘게 잘 자라 잘 살겠다”는 덕담이 작은 딸에게 큰 선물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또 3년 전부터 고객 50% 할인 행사와 그 수익금은 한인 단체에 기부하는 나눔의 선행도 하고 있다. 큰 딸에게 좋은 환경에서 공부 시켜보겠다고 미국에 왔는데 그해 아이비리그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아빠로서 합격의 기쁨과 더불어 딸에게 의미 있는 추억을 주고 싶어서 마련한 행사였다. 무엇보다, 1회성 행사로 그치지 않고 꾸준히 앞으로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계속할 계획이다.
그는 큰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꼭 학교를 데려다 주었다. 지금 작은 딸의 등굣길도 마찬가지다. 늘 그렇게 아침시간에 학교를 데려다 주면서 딸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난 널 믿는다. 공부보다 친구 많이 사귀고 책 많이 읽고 여행 많이 다녀라’였다. 그렇게 쌓인 부녀간의 신뢰는 아직도 계속 진행형이다.
그는 가정적이다. 그래서 세상에 태어나 감사하는 게 세 가지다. 첫째는 어머니 몸에서 태어난 거, 둘째는 딸 둘이 내 새끼가 되어 준 거 마지막은 아내가 집사람이 되어 준 것이다. 그리고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은 동갑내기 아내를 만난일이라고 한다.
그에게 행복은 나 스스로 만족하는 것이며 그래서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다. 앞으로의 꿈은 맨하탄에 중국집을 차리는 것. 그리고 은퇴 후에는 일주일에 2번 정도는 자신이 배운 솜씨로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다.
그는 인터뷰를 끝내며 “나는 가진 거 배운 거 없어도 사람 복이 많아서 힘들고 어려울 때 도와주는 사람들이 옆에 있어서 행복한 사람이다. 세상 사람들도 나만큼만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기원했다.<연창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