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헌 (맨체스터대학 교수)
햇살이 따뜻한 날이었다. 바람이 일던 공동묘지에는 조화가 여기 저기 널려 있고,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이 곳곳에 무리를 지어 모여 있었다. 가까이 지내는 직장 동료가 전화를 해서 어디에 있는지 물었을 때, 지금 공동묘지에 있다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천국의 문(Gate of Heaven)에 있다고 했더니 목소리에 놀라는 기색이 완연했다. 봄만 되면 내가 앨러지로 고생하는 것을 보아온 터라, 내가 병원 응급실에라도 가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런 게 아니라 잘 아는 분이 돌아가서 장례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이 묘지의 이름이 천국의 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천국의 문, 하필이면 묘지 이름을 천국의 문으로 지었을까? 사람이 죽으면 모두 천국에 간다는 것일까 아니면 천국에서 다시 만나고 싶다는 희망을 담고 있는 이름일까?
사람이 죽는 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것은 헤어짐을 가장 날카롭고 확실하게 보여주는 우리 삶의 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 새롭고 영원한 삶의 시작이라고 믿는 기독교인들의 예배였지만, 역시 슬픈 것은 슬픈 것 일 수밖에 없었다. 헤어짐은 그리움을 낳게 되고, 그리움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을 뻗어서 만질 수 없는, 우리 삶 속의 가장 초보적인 관계가 사라져버린 바로 그 곳에 피어나는 외로운 꽃과 같은 것이 아닌가.
인생을 순례자의 여정으로 생각하는 기독교의 인생관은 헤어져 슬픈 것은 잠시일 뿐, 영원한 천국에서 다시 만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노래하고 있다. “천국 문에서 만나자, 그 아침이 될 때에, 순례자여 예비하라 시간이 안 늦도록……” 그러나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우리가 죽으면 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가르침을 읽은 기억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을 “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는 두 계명으로 요약했다. 이 두 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누가 이 두 계명을 완전하게 지켰다고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의 역사는 계명을 지키려는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라는 신학적인 결론이 자연스러운 것은, 우리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자각 때문일 것 이다.
따뜻하던 지난 주말, 천국의 문을 나서며 나누던 대화가 새롭다. “날이 좋아서 그런 가 돌아간 사람들이 많네!” “아니, 돌아가는 사람이 좋은 날 궂은 날 가려서 돌아가나?” 돌아간다, 흙에서 흙으로? 사람이 돌아가면 어디로 돌아간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 일까? 돌아가신 어머님 아버님이 몹시도 그리운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