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즈음이면 대학입시 합격자 발표로 고등학교 졸업반 아이를 둔 가정의 희비가 엇갈린다. 대학이라는 거대한 세상에 발을 내딛는 후배들에게 격려와 축하를 보내고 싶다.
나의 고3 시기는 소위 말하는 6월 항쟁의 87년 봄과 함께 시작되었다. 시국은 내내 불안정했다. 서초동에서 차를 타고 광화문 앞을 지나 청와대 앞길을 끼고 돌아 평창동에 이르는 등굣길은 참으로 기이한 풍경을 보여 주었다.
아침 공기에 전해 오는 매캐함,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괴괴한 서울 중심부, 말하자면 차도 한복판에 굴러다니는 최루탄 탄피라든지 찢어진 고무 타이어, 전날 저녁의 넥타이부대까지 합류한 가두시위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굴러다니는 현수막 배너 등. 그런데 기이했던 것은 오후의 하굣길에는 그런 흔적들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거리는 말끔히 청소되어 있었고 시민들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양 일상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신기했던 것은 이 모든 눈으로 확인 되는 현장이 매일 밤 시청하는 9시 TV 뉴스에는 도무지 등장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정치가 여전히 소용돌이 속이었던 다음 해 나는 원하던 대학교 음악대학에 입학하였다. 아크로 광장을 지나 학생회관 옆길을 지나가다 보면 시국에 대한 많은 대자보며 현수막,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읽으며 나는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다른 학생들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일념으로 젊음을 불태우고 있지 않은가. 대학 첫 해에 학생들끼리 조직된 챔버 오케스트라에 합류하여 연주회도 열심히 하였지만 나는 감히 타과 친구들에게 나의 연주회 소식을 알릴 수가 없었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음악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이후 음악은 다른 선택이 없는 인생의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내가 하는 서양음악은 이 모든 투쟁과 몸부림과는 별개로 보였고, 그 상관없음으로 인하여 나는 괴리감과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안전하고 약간 비겁한 방법을 선택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배우기로 한 것이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숲속의 방, 우리 시대의 철학, 강철 군화 등등… 하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80년대에 음대생으로 학창시절을 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는 답이 필요했었다. 음악, 예술이란 무엇인가. 음악은 과연 이 척박한 세상에 필요한 것인가. 학우들이 목숨바쳐 지키려는 노동자들과 내가 하는 음악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대답은 어느 날 하나님의 은총처럼 내게 주어졌다. 그때 그 기쁨이란, 그 안도감이란! 그것은 내 삶을 음악과 함께 살아갈 충분한 이유가 되어 주었다.
대학시절이란 참으로 포효하는 파도의 대해를 통과하는 듯한 자기 성찰, 자기 검증 그리고 자기 혁명의 과정이다. 이같은 시기를 보람 있고 의미 있게 보내를, 새로이 대학에 발을 내딛는 모든 이에게 기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