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헌 (맨체스터 대학 철학교수)
지난 밤 꿈이 아직도 생생하다.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내 고향 동갑내기 친구의 꿈이었다. 어려서 부친이 돌아가고 가세가 기울어 어렵게 살았지만, 양반의 후손이라는 자부심 잃지 않고 살아가던 영명(英明)한 소년이었다. 오래 전 우리 집에는 나의 당숙께서 한문을 가르치던 서당이 있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그와 나는 서당에서 아침 마다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함께 외우고 배웠다.
조선 초기의 명재상이었던 맹사성의 후손이라는 것을 훈장께서는 종아리를 칠 때 마다 되풀이 하게하셨고, 종아리를 잡고 눈물을 흘리며 “신창 맹”씨를 열 번씩 외쳐야 했던 그 친구의 모습이, 이제는 다 고전 속에나 나오는 그림 같은 모습이 되었다.
12월은 나에게는 특별한 달이다. 예수께서 탄생 하신 크리스마스는 물론이요 나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이 모두 12월이다. 나의 부친께서 작고하신 달이 또한 12월이다. 잠깐의 영국 유학을 마치고, 보스턴 형님 댁에서 대학원 입학시험(GRE)을 준비하고 있던 12월 어느 이른 새벽, 아버님께서 돌아 가셨다는 부음이 날아들었다. 바로 다음 날이 시험 이었다. 중형과 막내 형께서는 “두 형이 장례에 참석하니, 너는 남아서 시험을 잘 치르고 좋은 대학원에 진학 하는 것이 아버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간곡하게 타이르셨다. 결국 뒤에 처져 시험을 보기는 했으나, 그 처연했던 마음을 나는 지금도 잊을 길이 없다. 장례와 초성묘 예배(삼우제)도 다 지난 어느 날, 한국 에서 걸려온 전화는 뜻밖에도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바로 그 고향 친구였다.
장례식에서 형님들을 만나 나의 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돌아가신 나의 부친이 자기에게도 친아버님과 같았다고 울먹였다. 내가 서울로 중학교를 가기 위해 고향을 떠나던 날, 기차역까지 이십 리나 되는 먼 길을 달려와 내 손을 잡고 울던 그의 모습이 빛바랜 사진처럼 아직도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작은 주머니에 볶은 콩을 넣어가지고 와서 손에 쥐어 주던 그는, 14살 어린 나이에 서울로 가출을 하고 말았다.
가출한 소년을 마포 어디에 있던 가구공장에서 찾아 온 분은 나의 아버님이었다.
집안과 친분이 있는 ‘세창서관’이라는 고전과 한문책을 전문으로 다루던 서점에 일 할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서점 한 구석 작은 방에 그가 자취할 수 있게 하고, 문교부에 계시던 큰형님은 그를 청파동에 있는 S상업학교 야간에 입학을 시켜서 저녁에는 공부할 수 있게 했다.
4.19 혁명이 터지고 온 장안이 소란하던 하루, 터벅터벅 종로 거리를 걸어서 그가 일하는 책방을 찾아갔다. 성격이 착하고 차분한 그였다. 깨끗하게 정리된 작은 방에는 이부자리가 정결하게 쌓여 있고, 그 위 벽에는 그 친구의 어머님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러나 내 눈이 머문 곳은 그 사진 밑 세모필로 물 흐르듯 써 내려 간 유려한 붓 글씨였다.
“온유하고 겸손하며 올바르고 굳세게, 어머님의 뜻 받들어 보람 있게 살리라.”서점을 자주 찾아오던 주요한 선생의 시에서 따온 한 줄이라고 했다. 그는 어려서도 명필이었다. 그의 붓글씨는 항상 그 모친의 자랑이었다. 어머니 몰래 가출한 어린 소년의 가슴에 어떤 슬픔이 있었을 지, 반세기 가 지난 이제야 겨우 짐작이 가는 듯하다. 서울 상대를 거쳐서, 유수한 은행의 임원을 지내고 소위 명퇴를 한 그를 마지막 만난 곳이 6년 전 봄 내 큰 형님 장례 예배였다.
그 해 12월 중동지방 선교에서 돌아온 그는 그 곳에서 걸린 풍토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풍파 많은 세상에서 선한 싸움 싸우다, 생명 시내 흐르는 곳 길이 함께 살리라.” 일생을 보람 있게 산 그였다. 주요한 선생의 남은 시 한 줄을 찾아, 이제는 모두 모여 영원한 삶을 살고 있을 떠난 분들의 영전에 삼가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