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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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체스터/ 독자의 글: 엄마의 흔적이 없는 친정 집

2014-12-0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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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명(브롱스빌 거주)

1년 전 엄마가 치매와 파킨스를 심하게 앓으시고 요양원에 계시다가 집으로 오셔서 두 달 남짓을 나와 함께 지내셨다. 그 때 엄마는 간절히 바라셨던 집에서의 생활을 끝내고 다시 요양원에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아시고 며칠을 앓으시고 식음을 전패하셨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엄마를 다시 요양원으로 보내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전화상으로 전해들은 엄마의 상태는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유일한 의사 전달 방법이던 눈빛마저도 약하디 약해져서 눈빛이 주는 의미도 구별하기가 힘들게 되었다며 "이제는 너를 몰라보실 것 같아" 하는 언니의 말에 놀란 나는 허둥지둥 한국으로 향했다. 짧게나마 나는 엄마를 더 마음에 새겨 두고, 엄마에게 멀리 있는 막내딸을 조금이나마 더 보여 주고 싶은 생각이었다.


엄마 생각만 하고 간 한국 행이였지만, 엄마가 안계시고 아버지가 혼자 사시는 친정집은 또 다른 걱정거리로 내 마음을 짓눌렀다. 아버지의 얼룩진 바지부터, 목욕탕의 물 때 낀 비누통, 녹이 다 쓴 면도기, 솔이 다 누워버린 칫솔.... 엄마는 수건과 걸레는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파르스름할 만큼 뽀얀 하얀 색이었고, 까슬하니 풀 먹인 이불은 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임에도 빳빳하게 풀 먹은 이불은 엄마의 자부심이셨다. 음식 솜씨도 좋으셨는데.....

이제는 친정집 어디에도 엄마의 흔적은 없고, 아버지의 따분한 일상만이 집안에 가득했었다. 아버지의 일상은 아침 식사 하신 후 엄마를 방문하러 가시는 일이었다. 팔십이 넘은 노인이 요양원에 있는 아내를 만나기 위해 매일 아침 어설픈 운전을 하시는 모습은 나를 슬프게 했었다.

아버지께서는 엄마가 요양원으로 들어가신 후로, 입버릇처럼 엄마가 먼저 돌아가시고 뒤처리를 다 하신 다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게 소원이시라는 같은 말만 반복하시며 하루하루를 보내시고 계셨다. 한국을 방문한 일주일 남짓의 짧은 시간 동안 처음에는 엄마가 나를 알아보시는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를 안고 있으면 엄마의 손가락이 꼼지락 꼼지락 하면서 나를 만지셨다. 엄마는 파킨슨이 심하셔서 전혀 못 움직이시는데, 손가락 움직이는 걸 본 요양사와 수녀님들께서 (엄마는 가톨릭 재단 요양원에 계신다.) 막내딸을 진짜로 많이 사랑하시는 것 같다며 신기해 하셨다.

일주일을 얼마나 울었던지. 엄마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꼬옥 안아 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나는 내 생애 가장 많은 시간을 엄마를 안고서 보냈다. 마지막 날 표정이 없으셨던 엄마 얼굴이 슬프게 변하시고, 눈에 눈물도 고이셨다. 사랑한다고, 잘 키워 줘서 고맙다고, 빨리 또 올 거라며, 난 미국으로 돌아 왔다. 조심해서 가라며 얼굴도 안 쳐다보시던 아버지도 차 뒤에서 한참을 우셨다.

행복하기만 했었던 어린 시절은 다 지나가고, 어느 덧 인생을 마무리해야 하는 시간에 서 계시는 부모님 모습에 마음이 아려 왔었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효도를 다 하라는 말이 가슴에 맴 돌기만 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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