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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네티컷/ 칼럼: 아름다운 마무리

2014-12-0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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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선 <수필가>

결의를 다지듯이 엄숙하게 받아 든 두툼했던 새 달력이 시나브로 한 장씩 사라지더니 어느 사이 하얀 눈 위에서 신나게 팽이를 지치는 아이들의 해맑은 그림으로 올해의 마지막 달을 장식한다.

의지도 약해지고 정성도 부족해서 오랫동안 써오던 일기를 멈춘 지도 시간이 꽤 흘렀고 작지만 살아가는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개인적 소견에서 하루하루 중요한 일들이나 기억해야 할 사안들을 간단하게 적어두는 습관으로 일기를 갈음하고 있다.


서로를 격려 하듯 볼을 부비며 포근하게 눈 내리는 12월의 문턱에서 숙제를 복습하듯이 손때 묻은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기다 불현듯 묵직한 문장 한 줄이 뇌리를 스치다가 가슴으로 아리하게 내려와 앉는다. 그때는 그토록 중요해서 빨간 펜으로 또렷하게 적어 놓고 그래도 부족하다 싶으면 몇 개의 별표를 그려 가며 착하게 기록해 놓았던 내용들이 대부분 사무적이고 소모적인 일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음을 자각하는 데는 커피한잔을 비우는 짧은 시간으로도 충분했다.

리메이크 할 수 없는 지나간 일들을 다시 덮어 놓고 뒤엉키는 감정을 알듯 말듯 한 엷은 미소로 대신한다. 살아가다 보면 그냥 지나쳐도 될 일에 집중하다 정작 붙들어야 할 것을 놓칠 때가 있고 일의 순서가 앞뒤로 바뀌어서 뒤틀린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잠잠히 침묵할 때 요란을 떨고 정당한 의견을 내세워야 할 때 강자의 뒤에 숨어서 비겁한 방관자가 될 때도 있다. 또한 내어 주어야 할 때와 거둬야 할 기회를 깨닫지 못 하고 어리석은 자리에 처할 때도 있다.

새 해를 시작 할 때마다 반복하는 빛깔 좋고 향기 나는 계획들은 어느 모퉁이에서 흐릿하게 지워져 가고 한 해를 마감할 때쯤에는 몇 곡의 앙코르라도 소리 높여 부를 듯이 부풀어 있던 꿈들도 잠깐 머물다가 떠나간 손님처럼 어렴풋이 잔영으로 남아 소리 없이 쌓여 가는 눈 속에 숨어 버렸다. 아쉬움과 후회의 교차점에서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의 "인생은 뒤를 돌아보며 비로소 이해하는 것 이지만 앞을 보면서 살아야 된다"는 말을 되새기며 위로를 받는다.

아직도 내일 또 한 주 한 달이라는 풀어 보지 않은 선물 보따리가 기다리고 있음에 감사를 한다. 앞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인생이라면 지나간 일들은 떠나는 시간에 실어 보내고 실수와 오해도 인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면 지금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쉬움에 사로 잡혀 찾아오는 햇살을 피할 이유도 없고 긴 시간을 붙잡아 놓고 반성문을 쓸 필요도 없을 일이다 너무 늦었다고 포기하기에 앞서 어제 같지 않은 더 소중한 내일을 다시 꿈꾸어 볼 일이다.

실패는 도전하라는 선물이고 역경도 뒤집어 보면 경력이 된다. 남다른 경력으로 희망을 쏘아 올린 사람의 성공은 끝까지 박수를 받는다. 돌이켜 보니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획이라 세워 두었고 지나친 기대와 욕망이 꿈으로 포장되어 장식장에 진열 되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지난날을 뒤 돌아 보고 앞날을 다짐하는 감사의 계절에 남아있는 노트의 마지막을 무엇으로 채워야 아름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을까? 상처 난 곳은 싸매어 주어야 아물게 되고 엉킨 실타래는 풀어 놓아야 고운 옷을 다시 지을 수 있다. 자신만을 위해 성실했던 그 자리에서 기도의 낯은 자리를 편다.

살아가는 이야기로 희망을 나누고 존재의 이유로도 감사하며 자랑할 것 없는 나이 들어감이 부끄럽지 않기를 소명처럼 마음에 새겨 두고 눈이 부시게 다가 온 새벽을 접는다. 그리고 올해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는 예습처럼 서둘러 적어 두었다. "아름다운 마무리"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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