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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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생명 나눔

2014-11-1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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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분자 /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

네덜란드 출신의 렘브란트는 17세기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하나로 꼽힌다. ‘야경꾼’과 ‘자화상’ 등은 천문학적인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렘브란트는 의사나 간호사 등 의료계 종사자들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지닌 작품을 남겼다. 바로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년)다.

그림은 튈프 박사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외과의사협회 회원들에게 시신을 직접 해부하며 강의를 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시신을 중심으로 화면의 왼쪽에 7명이 강의를 듣고 있는 장면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시신이다. 렘브란트는 시신을 밝게 빛나는 모습으로 캔버스에 담았다. 튈프 박사와 의사들의 복장도 관심사다. 깔끔한 예복 차림으로 시신을 지켜보는 눈초리가 대단히 진지하다. 시신에 대한 존경심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튈프는 당시 네덜란드 최고의 외과의로 평판이 나있던 인물이다. 나중엔 이 같은 명성을 바탕으로 정계에도 진출, 암스테르담 시장까지 지냈다.

당시 암스테르담에서는 매년 한차례씩 공개 해부학 강의가 열렸는데 렘브란트가 초청작가로 지명돼 현장을 생동감있게 그려냈다. 의사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입장료를 내면 시신 해부장면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동의보감’의 주인공 허준은 국법을 어겨가며 시신의 몸속을 들여다 본 것으로 알려졌지만 서구에선 시신해부가 이미 공개행사로 자리 잡았다. 공교롭게도 튈프 박사와 허준은 비슷한 시기를 살았다. 성격이 올곧고 도덕심이 강해 둘은 닮은꼴이다.

시신기증의 중요성을 얘기할 때 나는 렘브란트의 그림과 함께 공병우 박사를 떠올린다. 공 박사는 평생 한글사랑 운동을 펴온 안과의사이자 국내 최초로 한글타자기를 발명한 분이다. 지난 1995년 89세를 일기로 타계한 공 박사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해부학 교실에 기증됐다.

유족은 “내 죽음을 세상에 알리거나 장례식을 치르지 말고 연세대 병원에 시신을 기증하라”는 고인의 유언을 지켜 빈소도 마련하지 않았다.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할 것을 아울러 당부했으나 노환으로 숨져 장기기증의 뜻은 이루지 못했다.

그의 시신 기증은 울림이 컸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도덕적 책무,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으로 꼽혀 일반인들에게도 시신기증이 널리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후진국에선 무연고 시신을 해부하지만 미국 같은 선진국에선 기증 시신을 해부하는 게 관행처럼 돼있다. 사실 의과대학에선 시신을 해부하며 해부학만 배우는 게 아니다. 의학을 눈과 손으로 익히고, 동료를 아끼는 우정, 삶을 소중하게 여기는 인간성을 배운다. 모두 의료인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시신이란 입고 있다고 벗어 놓은 옷 같은 것이어서 굳이 애착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내 몸을 이 사회에 마지막 선물로 남기고 떠납니다.”

공병우 박사가 남긴 이 말이 지금도 가슴 한켠에서 뭉클하다.

스위스 베른의 시신기증 추모비에는 이런 라틴어 문구가 쓰여 있다. “모르투이 프로수무스 비타에(Mortui Prosumus Vitae).” 번역하면 “우리는 죽어서도 삶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오는 15일, UC어바인 의과대학과 소망소사이어티는 한인 시신기증자 추모식을 갖는다. 한인사회에선 처음이다. 소망소사이어티의 캠페인 결과 시신기증을 서약한 한인들은 벌써 630명이나 된다. 시신기증은 숭고한 인간 사랑의 실천이자 마지막 생명 나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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