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느 정치인의 망언

2014-11-0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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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언대

“소녀상이 한일관계를 악화시킬 뿐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본 내의 반감도 엄청나다.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자.”그냥 평범한 사람이 사석에서 한 발언이 아니다. 6선의원에다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고 국회의장까지 맡았던 대한민국 최고 지도층 인사가 글렌데일 소녀상을 방문한 직후 한 발언이라는 점이 충격적이다. 더욱이 그의 방미목적이 차세대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었다니, 우리 아이들이 그로부터 무엇을 배웠을지 궁금하다.

굳이 민족감정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냥 2차 대전 중 침략전쟁을 일으킨 어떤 나라 군대가 상대국의 여성과 어린이 수십만명을 강제로 끌고 가 국가의 비호 아래 성노예로 삼고 강간, 폭행, 강제유산, 살인을 밥먹듯 저질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미국인들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강제연행은 없었다고, 모두 자원해서 간 거라고, 군인들보다 수십배 많은 돈을 받은 창녀였을 뿐이라고, 일본인 국수주의자들이 떼로 몰려와 시위를 하고 억지를 부려도 “너희 나라 역사를 제대로 알라”며 일침을 가하고, 할머니들의 인권과 명예를 위해 소녀상 설립을 허락한 글렌데일이다.


물론 저절로 이루어진 성과는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대화와 교육, 한인동포들의 열화와 같은 모금운동, 또 공청회에 참석해서 보여준 뜨거운 지지 등 우리의 정치력을 적재적소에 발휘했기 때문에 미국 지자체가 움직이고 미국 정치인이 마음을 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어떤가. 위로는 아베총리부터 아래로는 자민당과 국수주의적인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전쟁범죄와 인권유린의 역사를 부인하고 미화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일본군 위안부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담화는 지난 20년간 셀 수 없는 부정과 흠집내기를 통해, 이미 공식입장으로서의 지위를 잃은 지 오래다. 특히 담화 발표자였던 요헤이 고노는 당시 일본총리가 아닌 관방장관이었기 때문에, 할머니들이 요구하는 일본총리의 공식사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일본의 교육부 장관조차도, 고노담화가 일본 의회의 인준을 받지 못해 공식성이 결여되어 교과서에 수록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 뿐인가. 집권 자민당 내에는 미국내 위안부 운동에 대항하기 위한 특별기금이 조성되어 있으며‘일본의 명예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특명위원회’에서는 ‘일본의 명예회복책’을 연내에 만들어내겠다고 아우성이다. 겉으로는 반성하는 척, 고노담화를 계승한다며 비판여론을 잠재운 후, 돌아서서는 자기가 오히려 피해자인 양 ‘명예회복’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오늘날 일본의 민낯이다.

상황이 이러한 데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은 어떤가. 전 국회의장은 “역지사지(일본)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자”고 한인동포들을 점잖게 야단치고 있다.

한일의원연맹 소속 의원들은 “한일 양측은 고노, 무라야마 담화정신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일본이 제대로 된 공식사과를 하고 피해자들에게 국가차원의 배상을 해야 한다는 미국정치권과 국제사회의 인식이 높아져 가고 있는 지금 고노담화라는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마치도 일보진전인 양, 양보하는 척 하는 일본 정치인들에게 우리 국회의원들이 놀아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미국방문 때마다 글렌데일 소녀상 앞에 가서 사진 찍고 언론 플레이 하는 한국 정치인들 중 몇 명이나 수요시위에 참석해 보았는지, 생존자 할머니의 허름한 단칸방에 찾아가 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김현정 가주한미포럼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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